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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혃아. 그 소식 들었어? 쟤환이 들어왔다더라.
운이 열심히 구운 고기를 날름 집어먹으며 연이 말했다. 신나게 젓가락질을 하던 손이 멎고 혃이 연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앉아 쌈을 싸던 싟도, 당근을 집어들던 빈도 혃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혃은 결국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내렸다. 아차 싶은 표정의 연과 조로록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형들의 모습에 혃이 짜증스레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누가 들어와? 이쟤환이? 다 알고 있었어요? 나만 모르고?
-우리도 저번주쯤에 알았어
혃을 달래려던 운의 말이 기름을 부었다.
-일주우?? 그럼 일주일동안 나한테 말을 안했어요?
-아니, 혃아. 우리가 부러 말을 안 한게 아니라..
-됐어요. 이쟤환이 들어와서 뭐. 날 다시 보고싶대요?
싟이 허둥대자 혃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놓았던 젓가락을 들며 고기를 왕창 입에 쳐 넣으며 혃은 욕도 함께 삼켜버렸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 모든 걸 버려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그런 자신을 버리고 한 마디 말 없이 사라졌던 사람.
-혹시라도 자리 만들 생각하지마요. 죽여버릴테니까
전투적으로 고기를 씹던 혃은 담배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혃이 긴다리로 휘적휘적 사라지고 연의 싟의 등떠밈에 운이 혃의 뒤를 따라나섰다.
불이 붙지 않아 갖은 짜증을 내는데 불쑥 하얀 손이 불을 붙였다.
-환이가 너 보고싶어해.
-저를요? 왜요? 사라졌으면서 왜 나타났대요?
-.... 한국에 오래 안 있어. 전시회 개최하러 온거래. 길어야 두 달 정도 있을거야. 만날 지 말지는 니가 정해. 만나라고 억지로 강요하지 않을거니까.
가볍게 어깨를 도닥인 운이 먼저 건물로 들어가고 혃은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혃은 대학 신입생이었다. 학생이면서도 지면에 꾸준히 사진이 실리는 탟운을 동경해 그의 학교를 쫒아온 풋풋한 스무살이었다. 그리고 쟤환을 만났다.
미대 학생들은 과제때문에 모델과에 컨택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미대 학생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운이 유일하게 곁을 허락하는 이가 쟤환이었다. 본격적으로 모델일을 하게 되면서 쟤환의 과제를 돕지 못하게 되자 운은 저를 잘 따르는 후배 상혃을 쟤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형만큼 피지컬 좋은 사람이 또 어디있어요. 퉁퉁대던 쟤환은 혃을 보곤 입을 삭 닦으며 웃었다. 과제를 핑계로 매일 같이 쟤환의 작업실을 찾았다. 손에 혃을 익혀야 한다며 쟤환은 수도 없이 혃을 크로키했다. 도톰한 드로잉북이 혃으로 가득찰때 쯤 커다란 캔버스에는 혃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혃은 근육을 자세히 그리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쟤환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부끄러우니 형도 벗으라며 억지로 쟤환의 상의를 들추기도 했다. 콩테를 들고 혹여 검댕을 묻힐까 팔을 높히 들어올린 쟤환의 옷 속에 손을 넣으며 혃은 쟤환의입술에 입을 맞췄다. 종이에 퍼지는 수채화처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쟤환과 혃은 서로에게 물들어버렸다.
그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은 딱 다섯이었다.
처음 둘을 소개시켰던 운. 운의 친구로 운만 보였다 싶으면 졸졸 따라와 인사를 건네는 무용과 연. 같은 모델과 선배로 운처럼 혃이 존경하는 싟. 싟의 친구이자 모델과에 미대 다음으로 컨택을 자주하는 사진과 빈.
비밀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여섯은 곧잘 뭉치곤 했다. 사랑을 더럽다 손가락질 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쟤환과 혃은 순조로운 연애를 이어갔다. 아니, 순조롭다 여긴 것은 혃 하나 뿐이었다. 혃도 모르는 사이 쟤환이 바다 건너 머나먼 곳으로 도망쳐버렸으니까
쟤환이 사라지고 혃은 톱니바퀴가 하나 빠진 것 처럼 삐걱거렸다. 간간히 하던 모델 아르바이트도 때려치고 쟤환의 흔적만을 미친둣이 찾아 헤맸다.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였던 자취방도, 처음 그에게 입을 맞추었던 작업실도, 그 어디에도 쟤환은 없었다. 남은 거라곤 연필선이 번져 지저분해진 너덜거리는 드로잉북. 혃이 하도 어루어만지고 그 위로 눈물을 떨구어 그림이 본래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도 힘들어진 드로잉북 뿐이었다.
쟤환이 사라지고 1년, 혃은 미쳤고
그 다음 1년, 혃은 죽었고
그 다음 1년엔 쟤환을 죽였다.
그런데 이제와 돌아왔다고. 이제와 날 보고싶어한다고.
웃기지도 않는다.
에이전시를 나서며 혃은 피곤한 눈을 부볐다. 패디과 선배의 졸업 패션쇼에 섰다가 기획사 실장의 눈에 띄어 졸업 전부터 쇼에 심심찮게 올랐던 혃은 졸업하자마자부터 각종 화보촬영에 나섰다. 지난 번 간만에 만난 형들과의 고기파티 이후로 빡센 식단관리에야외촬영, 실내 밤샘 촬영까지 마치고 나자 눈꺼풀은 참을 수 없이 무거웠다. 문득 모델일을 때려치고 음악을 시작한 싟이 떠올랐다. 길게 생각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든 혃은 싟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형 작업실이죠?
-어, 어? 그렇지?
-저 거기서 좀 만 잘게요. 밤샘 촬영해서 도저히 운전하고 집 못가겟어.
-지금???
-네, 앞이에요. 없는 듯이 잠만 잘게요.
-아니, 혃아!
평소처럼 '응, 혃아'가 아닌 '응'에서만 그치는 답과 눈에 띄게 놀라는 반응도 혃은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전시에서 도보로 갈 수 있을 거리에 위치한 싟의 작업실을 다행이라 여기며 긴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두터운 철문을 두들기고 벌컥 열어젖히는 순간, 무언가가 문에 딸려 끌려나왔다.
-이쟤환
잊어본 적 없는 이름이 익숙하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혃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손목이 붙잡혔다.
-혃아, 피곤하다며. 들어가서 쉬어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에 닿은 체온이 끔찍해 급히 털어냈다. 아프게 내쳐진 손을 반대손으로 감아쥔 쟤환이 멍하니 혃을 올려보았다
-그럼 난 들어가 쉴테니까 사라져줘요.
문이 닫히고 혃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고개를 드니 싟이 혃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쟤가 왜 여기 있어요.
-어? 아니- 잠깐 한국에 있는건데 집을 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 어달을 호텔에서 보낼 수도 없어서... 나 작업실 빈 방 있으니까 들어오라 했지...
-후우...
-일단 야, 왔으니까 좀 쉬다가라
싟이 소매를 잡아 끌어당겼다. 가끔 혃이 신세를 지던 방에 들어선 혃은 신경질적으로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순간 마주친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놀라 잠깐 본 얼굴과 급히 시선을 떨어뜨려 본 익숙한 손. 커다란 눈은 조금 눈물에 젖어있었고, 마디가 굵던 손은 살이 더욱 빠진듯 뼈가 불거져있었다. 치렁치렁하게 반지를 끼던 주제에 반지 하나 없이 소박한 손. 손을 내치니 멍해지던 얼굴. 아, 내가 이런 걸 왜 떠올리고 있는거야. 혁시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씨발. 쟤환의 체향이 났다.
혃의 전화를 받고 싟은 급하게 쟤환의 방문을 두들겼다.
-형! 쟤환아! 지금 혃이 온대!!
외투를 입지도 못하고 품에 끌어안은 채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이 열리고 날카로워진 혃의 얼굴이 보였다. 목이 메어와 숨을 멈추는데 혃이 등을 돌렸다. 처음보는 뒷모습에 놀라 손을 잡고 거세게 내쳐졌다. 빨개진 손등을 보며 쟤환은 서글프게 웃었다.
혃은 결국 잠에 들지 못했다. 코 끝을 맴도는 향에 박차고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혀, 혃아! 가냐?
헤드폰을 눌러쓰려던 싟이 후다닥 달려나왔다. 왜, 좀 쉬다가지... 뒷머리를 긁는 싟에게 울컥 화를 내려다 삼켰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거죠? 그럼 난 당분간 여기 안와요.
-어어? 응. 야, 그래도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안봐요. 영원히 볼 일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기분나빠요. 안그래도 피곤한데 짜증까지 나.
문을 열었다. 짜증서린 눈을 그대로 돌리는데 그 앞에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쟤환이 서있었다. 외투도 입지않고 품에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쟤환아! 어디 카페라도 가 있으라니까!
싟이 품에 안은 외투를 빼앗아 어깨에 걸쳐주며 환을 끌어당겼다. 혃의 말을 들었을까 싶어 굳어버린 싟의 눈이 혃을 향하고 '가라' 입모양으로만 인사를 건네며 문을 닫았다.
"후-"
진심으로 온 몸이 피곤해져버렸다. 그래도 삼사십분은 되었을텐데 계속 이 앞에 서있던 걸까. 추위도 잘 타는 사람이. 외투를 들고 있으면서 왜 안 입어? 멍청해가지고- 피어오르는 짜증에 쾅쾅 발을 구르며 다시 에이전시로 향했다. 사무실 소파에 구겨져서 자든, 차에서 자든 일단은 잠이 너무 절실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환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쟤환은 자꾸만 혃의 앞에 나타났다. 스튜디오를 차린 빈을 만나러 가거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댄스를 가르키는 연을 만나거나 같은 에이전시 소속 선배인 운을 만나려할때면 그 어디에서나 환은 혃의 앞에 튀어나왔다. 짜증스런 얼굴을 숨기지않고 부러 더 내보이는 혃을 보며 운은 가만히 환의 어깨를 끌어당겼고 빈은 큰 눈을 부라렸으며 연은 결국 한마디 했다.
-너랑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고 우리까지 환이를 못 볼 이유는 없는거잖아. 그리고 너, 환이가 왜 그렇게 떠나야만 했는지 알려고 해본적이라도 있어?
-내가 왜 알아야해요? 내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는데! 옆에서 다 봐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렇게 사라져 놓고! 이제 5년이에요. 5년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꾸 눈 앞에 알짱거려! 내가 근데 참아야해요? 참고 왜 그랬나 이해해야해요?
혃은 분노로 눈가가 달아올랐다. 혃을 보자마자 도망치려다 연에게 붙들려 서있던 쟤환은 그 분노의 화살을 피할 곳 하나 없이 온 몸을 맞았다. 손목을 잡은 연의 손이 떨어지자 쟤환은 힘 없는 발을 이끌어 문으로 향했다.
-미안해, 혃아. 그런데 나 정말 떠나고 싶지않았어. 나도 널 두고 사라지고 싶지않았어.
-그러면 뭐해. 결국 이렇게 됐잖아요.
-응. 그렇네. 어쩌자고 내가 다시 왔을까
-알았으면 빨리 꺼져, 제발
문고리만 만지작 대던 환이 문을 열고 나섰다. 한상혃! 연이 혃을 쏘아보았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며 주저앉는 혃의 모습에 머리만 헝클었다. 불꺼진 연습실. 아무리 숨을 죽여도 혃의 울음소리는 둥둥 울렸다.
-왜, 나타나서는, 날 또 울게해요. 정말 싫어. 싫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얇은 미닫이 문으로 혃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늘어뜨린 쟤환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손등을 덮는 긴 소매 안, 왼쪽 손목이 조금은 뜨거운 것 같았다.
응. 그러게. 나도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빈은 크리스마스에 맞춰 사진전을 열 계획이었다. 주제는 눈과 청춘. 별 오글거리는 주제라 놀리면서도 네 친구는 각자의 특기를 살려 빈의 사진전을 도왔다. 싟은 전시장 내에 흐를 음악, 그리고 셋은 모델로서.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연의 사진을 담는 것을 끝낸 빈은 운과 혃을 차례로 스튜디오로 불렀다. 그리고 오늘은 혃의 차례. 막내라고 맨날 젤 나중에 부르는 거 아니에요? 혃은 투덜거리면서도 기꺼이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일을 할 때는 들고 다니지 않던 크로스백을 간만에 꺼내 들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언제나 그랬듯 한 쪽에 쟤환이 있었다. 이젠 일일히 짜증내기도 지쳐 본 체 만 체하며 지나친 혃은 한쪽 구석에 가방을 벗어냈다.
-저건 또 왜 여기있어요
-저거라니.. 형도 전시회하잖아. 그림 몇개 더 그려서 전시회할때 걸꺼래. 우리들 그릴거라던데. 그래서 매번 우리랑 같이 있던 거고. 우리 일하는거 그린다구.
그러고 보니 혃이 오면 급히 자리를 피하던 쟤환의 자리엔 드로잉북과 연필이 놓여있던 것도 같았다. 알게뭐야.
-난 그림에서 빼달라고 해요. 기분나쁘니까.
뻔히 들리는 목소리에 쟤환이 어깨를 떨었다. 불안하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거울을 통해 보여서 비죽 입술을 올렸다. 쟤환만 보면 마음이 이상했다. 명확히 분노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니었다. 조금 먹먹하고 콕콕 쑤시는 느낌. 쟤환의 시선이 저에게 닿았다가 황급히 떨어질 때면 그 느낌은 더욱 커졌다.
한창 촬영을 하고 환은 그림을 그렸다. 빈을 향했다가 자신을 거쳐 밑으로 떨어지는 시선은 진즉 눈치챘지만 모른척했다. 난 이렇게 멀쩡해. 아주 잘 살아. 이제 모델로도 성공했어. 니가 사라져 준 덕분에. 라 말하며 상처입히고 싶었다.
-혃아. 너 립밤같은거 없냐?
-왜요?
-조명때문인가? 좀 말라보여서
-가방에 있을거에요.
-오키, 내가 가져올게 그러고 있어. 지금 자세 좋아.
빈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쟤환의 옆쪽으로 다가갔다. 천으로 된 가방이 거의 비어있는 것을 보곤 아예 뒤집어 흔들었다.
-아, 형!
소리치는 혃의 목소리 위로 둔탁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쟤환의 드로잉북이었다. 쟤환의 눈이 커지고 곧 드로잉북으로 손을 뻗었다. 당황한 혃이 금새 달려와 쟤환의 손등을 쳐냈다.
-혃아...그거...
-버릴라고 찾았는데 없더니, 이 가방에 있었네.
드로잉북을 더럽다는 듯 집게 손가락으로 들며 혃이 이죽였다. 물기가 들어차기 시작하는 눈을 내려다보다 망설임 없이 찢어냈다. 까만 그림이 가득한 종이를 찢어내고 두세번씩 더 찢었다. 빈은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눈물이 쟤환의 뺨을 타고 흘렀다. 찢겨진 종이가 바닥에 쌓였다.
-필요없으니 버리고 간거잖아. 나도 이제 필요없어요. 그러니까 버린건데, 왜. 아까워요?
-.......
-인정할 건 할게요. 형이 사라지고 나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젠 아니야. 형이 없어진 덕에 나 아무런 흠 없이 모델로 데뷔했어요. 아직은 탟운형처럼 유명하진 않아도 그쪽에선 꽤 얼굴도 알려졌어요. 이게 다 형 덕분이에요.
주저앉은 채로 종이만 보는 쟤환의 얼굴은 일그러짐 하나 없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울어봐. 더 울어봐. 얼굴을 찡그리고 추하게 울어봐.
그러나 쟤환은 반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게. 다행이야. 네 꿈을 이뤄냈네? 내가 사라져서 정말 다행이야.
드로잉북이 세운 무릎 옆으로 떨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은 굴러 혃의 발 앞에 닿았다. 몸을 일으킨 쟤환은 도망쳤다. 스치는 얼굴이 바람대로 일그러져있었는데 혃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너, 형한테 정말 그러면 안돼.
빈이 혃을 노려보았다.
-이쟤환이 왜 떠났는데, 새끼야. 다 너 때문이잖아.
말아쥔 주먹이 차마 혃의 뺨을 치지 못하고 부들대다 떨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넌, 니가 졸업패션쇼 덕에 캐스팅된 줄 알지. 훨씬 더 전이었어. 그 대표가 너 점 찍어둔 건.
쟤환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혃을 알게되면 깨닫는 새로운 감정이 많았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그림에 나타났고 교수님은 그런 그림을 칭찬했다. 사랑이란 감정 하나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집 앞 골목에서 혃과 달콤한 키스를 나누고 골목을 돌았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쟤환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에이전시 대표가 소개한 남자는 쟤환의 혃의 커다란 오점이라 말했다. 아무리 모델계에 동성애자라 심심찮게 있다해도 절대 용인될 수는 없다 했다. 이미 혃의 아버지도 쟤환의 존재를 알고있으며 혃의 곁에서 사라져주길 바란다고. 쟤환은 고개를 저었다. 대표의 앞에서도, 혃의 아버지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울었다. 저 혃이 없으면 못 살아요. 저 진짜 아무것도 없어도 돼요. 혃이만 있으면 돼요. 두 손을 싹싹 빌어도 보았지만 쟤환은 쫒겨났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의 어느 방. 벌레가 나오는 지하방. 쟤환은 눈을 뜨면 캔버스에 혃의 얼굴을 그렸고 잠이 들면 꿈에 혃을 그렸다. 차마 마음 속 혃을 죽이지 못해 자신을 죽였다. 수도 없이 손목을 긋고 하얀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다달히 혃의 아버지가 보내오는 돈으로 빵을 사먹고 모조리 토해냈다. 그림은 대상을 잃고 색도 잃었다. 우중충한 그림이라도 사람들은 그 앞에서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더러운 감정의 집합체를 좋아하는 이들에 쟤환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관광을 하러 왔다던 여행객에게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받았다. 혹시, 혃이를 볼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스쳐가는 얼굴이라도. 막연한 기대감에 서울행을 택했다.
우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스튜디오를 나와 달렸다. 담당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쟤환씨?
-저 그림 거의 다 그렸어요. 추가하고 싶은 거 이제 정말 없어요. 최대한 빨리, 빨리하면 안될까요? 저 다시 돌아가고싶어요. 한국에 더 있기 싫어요.
쟤환은 작업실에 쳐박혔다. 그동안 드로잉북에 그려두었던 그림들은 캔버스에 옮겨 그리고 그 위로 색을 입혔다. 예정일보다 이주정도 앞당겨진 전시회에 추가하기로 했던 그림을 빠른 시일내에 그려야만 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싟이 걱정스런 얼굴을 했지만 그 언젠가의 사건을 빈을 통해 들은터라 일을 서두르는 쟤환을 말리지 못했다. 싟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찾아오는 혃은 내치는 일 뿐이었다.
-형, 한번만. 이쟤환한테 할 말 있다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지금 형 바빠. 너때문에 감정노동 할 시간 없다고.
복잡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어내는 혃을 보며 싟도 잔뜩 복잡한 표정을 했다.
-붙잡기라도 하려고? 다시 시작할거야?
-잘 모르겠어요...
-그거부터 확실히 하고 와. 안그래도 힘든 사람 더 힘들게 하지마.
-형은 진짜 누구 편이에요
-굳이 나누자면 이쟤환편이야. 넌 이쟤환이라도 미워하면서 견뎠지. 이쟤환은? 말도 안통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어? 이쟤환 손목에 상처 본 적은 있어?
-....
-그냥, 너도 생각정리하고 나중에, 전시회때 보자. 안될까?
-알았어요...
밖에서 싟과 혃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쟤환은 커다란 캔버스를 짜냈다. 전시회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할 그림. 짙은 우울을 견뎌내고 과거의 빛을 찾는 다는 주제의 전시의 끝. 난 아직 빛을 찾지 못했는데 그림으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니 쟤환은 연필을 깎으며 입술을 씹었다. 찾을 빛은, 찾고 싶은 빛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하나라서. 그릴 수 있는거라곤 단 하나 뿐이어서.밑그림을 그리는 손은 막힘 없이 수천번을 그려냈던 선을 그었지만 뺨은 다시 눈물을 젖었다.결국엔 못 찾을 빛. 한상혃.
전시회가 다가왔다. 첫 날이라도 작가가 얼굴을 비추며 방문객을 맞이해야 한다는 실장의 말에도 쟤환은 한사코 손을 흔들었다.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울듯한 눈에 실장도 결국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쟤환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꼭 마지막 그 그림처럼 다시 빛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무 힘든 부탁을 했나봐... 한국 오랜만이라면서요. 그림그리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텐데 바삐 돌아가지말고 한 번만 돌아보고 가줘요.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 앞에선 고개를 주억거려놓고 싟의 작업실로 돌아온 쟤환은 바로 짐을 쌌다.
-갈거야? 전시 지켜보지도 않고?
-바로는 아니구.. 며칠 호텔에 있다 가려구. 너무 너한테 신세 많이 져서.
-괜찮은데..
-내가 안괜찮아.
혃은 초조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간단한 촬영을 하고 바로 전시회로 갈 생각이었는데 촬영이 딜레이 되고 있었다. 전시회장에 도착했다는 운과 연의 문자와 쟤환은 보이지 않는다는 빈의 연락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하필이면 울면서 나가는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라 불안감을 더욱 커졌다. 쟤환이 당장 전처럼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못된 말까지 잔뜩 해버렸으니 전보다 더 빨리 사라질 것 같았다.
전시회는 6시까지였다. 다섯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계를 보며 손톱을 깨물던 혃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상혃씨! 어디가요? 아직 안 끝났는데!!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오늘 촬영료 저 안 주셔도 괜찮아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허리를 숙여대다 달렸다. 손이 떨려 몇 번을 헛손질 한 끝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운과 연이 전시회장 앞에서 혃을 기다린 듯 했다.
-환이 안 왔어. 일단 전시회 봐. 끝까지.
-이쟤환은 어디있어요?
-일단, 봐. 전시회.
등을 떠미는 연에 회장 안으로 들어선 혃을 맞이한 첫 그림은 새카만 파도였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싟이 혃의 옆에서 같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혃인 것이 분명한 인영은 이리저리 뒤틀려 검은 파도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 옆의 그림은 쟤환이었다. 유난히 오똑한 코가 혃이 쟤환을 놀릴 때 그리던 그 그림이라 혃은 주먹을 꾹 쥐었다. 코 외에는 이목구비가 흐릿한 옆 얼굴은 검은 눈물을 쏟아내고 그 눈물을 파도가 되어 쟤환에게 몰아쳤다. 검었던 그림은 점차 빨개졌다. 핏빛이 캔버스 앞에서 혃은 눈을 천장을 향해 들었다. 반쯤 미친 자신이 이리저리 날뛰다 결국 쟤환을 증오하는 것으로 감정을 정리하는 동안 쟤환은 끝없는 우울에 잠겨 자신을 죽였다. 그림 가득 흘려낸 붉은 피와 날카롭게 솟아오른 가시들이 혃의 마음을 수도 없이 찔렀다. 발걸음은 우뚝 멈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런 혃의 등을 싟이 천천히 밀었다. 피로 가득했던 그림 옆으로 미미한 미소를 지은 탟운의 그림이 있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듯 형체가 뭉뚱그려졌던 그림은 탟운의 그림을 시작으로 점점 선명해졌다.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는 핛연. 보랏빛 조명 아래 수십개의 기계를 만지며 리듬을 타는 원싟, 얼굴만한 카메라를 얼굴에 대고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혼빈.
싟이 끄는 힘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던 혃은 한쪽 코너에 가장 크게 자리한 그림을 보았다. 오년 전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한상혃. 바로 자신.
눈 가득 고였던 눈물을 결국 떨어졌다. 가장 환한 빛으로 가득한 캔버스, 그 가운데에 웃고 있는 제 얼굴.
-형, 쟤환이, 어디있어요? 형은 알죠? 어디있어요? 설마 갔어요?
-안 갔어. 아직은. 니가 잡아야 해. 오늘 저녁 7시 비행기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전시회장을 정리하는 어수선한 움직임들과 6시를 향해가는 시곗바늘. 혃은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차에 올라다 엑셀을 밞았다. 거칠게 클락션을 울리고 과속을 하면서도 떠오르는 건 우는 쟤환의 얼굴 뿐이었다. 쟤환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작은 일그러짐도 없이 눈물을 흘려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내야 했을까, 뒤늦게 드는 생각에 자꾸만 가슴이 아파와서 있는 힘껏 가슴을 내리쳤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또 잃을 수는 없다.
넓은 공항을 뛰엇다. 프랑스행 승객들의 탑승을 요구하는 방송이 들려왔다.
가슴을 쥐고 달리며 쟤환의 이름을 불렀다. 게이트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아왔다.
-이쟤환!!!!
그리운 얼굴이 고개를 돌려 혃을 바라보았다
-혃아?
막아서는 가드들을 밀치고 들어가 쟤환을 끌어안았다.
-가지마. 가지마라. 나 또 형 못 보내. 그 아픈 데로 또 안 보내.
허공에 떠잇던 쟤환의 손이 조심스럽게 혃의 허리를 안아왔다. 조금 떨리는 손의 느낌에 혃은 조금 더 세게 쟤환을 안았다
-혃이야? 정말 혃이야?
-응. 나야. 진짜 나야.
그제야 얼떨떨하던 쟤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방울방울 맺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닦아냈다.
아무렇게나 주차해놔서 딱지가 붙은 차로 쟤환을 앉혔다. 집으로 향해 운전을 하면서도 옆에 앉은 쟤환이 사라질까 손을 뻗어 손을 잡았다. 문득 손목에 상처가 있다는 말이 떠올라 손을 잡아 끌었다. 긴 소매를 걷으려니 손을 잡아 빼려하기에 깍지를 껴 버렸다. 소매 안으로 아직도 울퉁불퉁한 손목이 드러났다. 몇번을 그어냈는지 그 선이 겹쳐진 곳도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손목 위에 입술을 부볐다.
-알려고도 안하고 무작정 미워했어요. 미안해.
-아니야..
-이렇게 아파하는 줄도 모르고 내가 너무 약하고 어렸어요.
-.....
-이번엔 진짜 내가 형을 지킬게요. 나 이제 그정도 힘 있어요
운전을 하며 힐긋거리는데 쟤환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혃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쟤환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렇개 소리 없이 울게도 안할게
혃이 찬찬히 등을 쓸어내렸다. 옷자락을 쥐어오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흐으-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 정말, 무서웠어.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들렸어. 내 모든게 부서지는 것 같았어. 그런데, 네 꿈이, 눈부셨던 네 꿈이 부셔질까봐, 그래서,
-형, 쟤환아. 내 꿈은 모델로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아냐. 내 꿈은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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