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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반쯤 떠진 눈을 부벼 잠을 떨치며 거실로 나서니 출근 준비에 한창인 택운이 보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택운이 슬몃 돌린 고개 너머로 시선만 흘깃 던졌다. 시선은 곧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지는 서류더미로 향했다.

"오늘은 더 일찍 나가네?"

"응. 새로 들어 온 일이 있어서 거래처 회사로 가봐야 해."

"으응..."

시선 한 줌 주지 않는 택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비뚤어진 넥타이로 시선을 옮겼다. 습관적으로 그 넥타이로 손을 뻗었지만 손의 의도를 깨달은 택운이 스스로 넥타이를 고치는 바람에 손은 허공에 멈추었다.

"오늘 늦어."

"응. 고생해."

어깨를 스쳐 지나간 택운이 큰 소리로 문을 닫고 나서고 구둣발 소리까지 아련히 멀어지자 재환은 허공에 뜬 채로 머물러있던 손을 내렸다. 손 끝에 닿던 택운의 온도가 어떠했는지 이제 어렴풋하게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가슴 아프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래된 연인이었다. 고등학교 선후배로 만났고, 참으로 어린 나이일적부터 어린 사랑을 키워왔다. 택운을 따라 그와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룸메를 구해 자취한다는 핑계로 그와 동거를 시작했을 때, 둘은 그 어느 커플보다도 열정적이었다. 서로를 향한 눈은 항상 뜨겁게 사랑을 외쳤고 두 손은 한 시로 떨어지지 못해 질척한 땀을 달고서도 맞붙어 있곤 했다. 조금 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우연히 자취방에 들어선 택운의 부모님에게 들켰던 그 날, 재환의 뺨이 택운의 어머니에 의해 마찰을 일으키며 돌아가고 택운의 입술이 아버지에 의해 붉게 터져버렸던 그 날,  그 날도 택운과 재환은 서로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이 그들을 외면한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사랑을 속삭였다.

 피처럼 붉었던 시간은 파랗게 바래졌다. 권태임을 재환은 느꼈지만 그 어떤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재환에게 택운마저 놓아버린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까, 제가 놓아버리면 택운 또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까, 재환은 택운을 놓지 못했다.

멍한 눈을 깜빡이며 개수대에 담긴 택운의 커피잔을 씻었다. 쌔카맣게 타버린 커피가 씻겨져 내려가고 커피잔은 새하얀 빛을 되찾았다.


재환은 특별히 옷매무새에 신경을 썼다. 항상 혼자만 있는 작업실에 오늘은 손님이 올 터였다. 항상 메일로만 주고받던 음악을 본격적으로 화면에 입히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었고, 작곡가라는 남자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고 했다. 제 음악이 어떠한 장면과 화합을 이뤄 어떠한 감정을 극대화하게 될 지 꼭 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했다. 처음 소개를 받아 메일주소를 교환하던 때 이후로 두번째 하는 통화에서 그 남자는 낮은 그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어투로 제 열정을 토해냈다.

메일로 받았던 음악을 틀어놓고 음이 입혀지지 않은 화면을 가만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치는 설산이 화면 가득 비춰져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얼었다가도 빠른 템포로 휘몰아치는 음들에 곧 뜨거워졌다. 온도가 오르는 심장에 손을 얹어 꾹꾹 눌러내는데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원식은 그가 만드는 음악만큼이나 열정적인 남자였다. 시종일관 눈꼬리가 쳐진 눈을 반짝이며 눈보라가 몰아칠 뿐인 화면을 바라보고 재환의 손에 따라 제 음악이 재생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 부분에서 음악을 재생하면 클라이막스 부분에 달할 때 눈사태가 일어나요. 그리고 그 눈 아래로는 눈에 묻혀버린 어린 눈토끼들이 있어요. 화면만 봤을 때보다는 음악이 깔리니까 조금 더 위급하고 처절해보이죠?"

감흥 없는 눈으로 음악을 재생하며 설명을 덧붙이다 원식을 바라보았다. 묘한 날카로움이 담겨있던 눈이 눈물을 머금기에 재환은 놀라 어깨를 굳혔다. 타인의 눈물을 보는 게 얼마만이지, 아니 내 눈물을 본 지는 얼마나 되었지. 휴지를 건넬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급한대로 손을 뻗어 원식의 눈가를 쓸었다.

"죄송해요"

낮은 음이 사과를 건네고 곧 이어서 멎쩍은 웃음이 뒤따랐다. 재환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 그 위로 제 손을 덮어내며 눈물을 닦아낸 원식이 얄쌍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심해와 같은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아있던 마음 한 구석에 붉은 빛이 비춰들었다.


원식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작업실로 가도 되겠냐는 문자가 재환을 깨웠고 재환이 잠들고 난 이후엔 다른 버전으로 편곡된 음악이 메일로 도착했다. 피곤한 기색 하나 없는 얼굴로 재환의 작업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원식은 재환의 손 끝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장면 장면에 웃고 울었다. 그런 원식을 보며 재환도 웃고 울었다. 소소한 일에도 쉽게 터지는 웃음과 울음에 재환은 어색함과 동시에 그리움을 느꼈다. 이렇게 웃고 운 적이 언제였던가. 매일 아침 고요히 인사를 건네고 집을 나섰다가 고요히 집으로 들어서 침대에 눕는 택운을 떠올렸다. 그 옆에 함께 고요히 멈추어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역동적으로 제 감정을 가감없이 내뱉는 원식을 바라보았다. 원식은 자꾸만 자신과 함께 하기를 권유하며 손을 내밀었다. 

원식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는 꽤나 호평을 받았다. 따라서 그와 함께하는 일은 그 기간을 점차 늘려갔다. 원식의 감정은 마른 땅으로 빗물이 스미듯 재환에게로 옮겨졌다. 원식은 매번 원식을 따라 웃는 재환의 입가를 쓸고 원식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원식보다도 먼저 눈물을 흘렸던 날, 뺨을 따라 내려오던 손가락은 입술에 멈추었다. 가만히 맞추어지던 시선이 흔들리고 뜨러움을 간직한 두 입술이 마주닿았다. 동요없이 가라앉았던 감정의 호수에 원식이 파동을 일으켰다.


"형, 재환아."

원식이 낮은 음으로 연주하는 이름은 항상 달콤했다. 불안과 설렘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아도 단단한 원식의 눈을 따스함만을 전해주곤 했다.

"나랑 살까?"

셔츠자락을 파고들어 허리를 쓸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원식이 물었다. 조용히 입술을 감춰무는 재환을 보며 조금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사랑하잖아."

"응."

 "그사람은...? 사랑해...?"

원식의 물음에 재환은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냐고 물으면 사랑한다는 답밖에 할 수 없었다. 재환의 모든 처음이 택운이었고 택운은 재환 그 자체였다. 두 손을 맞잡고 차가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저만 원식이란 온기를 잡고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원식을 사랑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재환은 택운을 사랑했다. 습관적으로 물어버리는 아랫입술을 가만 내려다보던 원식은 손을 뻗어 입술을 메만졌다.

"아니야, 미안해. 입술 깨물지마. 상하잖아."

좁은 턱을 감싸쥐는 뜨거운 손을 겹쳐잡으며 뺨을 부비니 곧 입술이 맞물려왔다. 고개를 꺾어 혀를 받아들이며 눈을 감는데 굳게 닫혀있던 작업실 문이 열렸다.

"..."

한 손에 초밥을 쥔 택운이 서 있었다. 후다닥 떨어진 두 사람을 바라보는 택운의 눈은 여전히 동요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밀어내는 재환의 팔을 붙잡고 선 원식이 눈을 날카롭게 늘이며 택운을 바라보았다. 혹여 주먹이라도 휘두르면 함께 응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택운은 고요한 표정만큼이나 고요한 발걸음으로 작업실에 들어섰다.

"이번에 출근하는 회사가 이 근처라. 저녁이나 같이 할까해서 와봤는데 식사 같이 할 사람이 있었네. 너 좋아하는 초밥 사왔으니까 먹으면서 해. 나한테 식사 거르지 말라고 잔소리는 다 하면서 매번 넌 거르더라."

"형..."

"2인분이니까 나눠먹고. 난 그냥 나가서 먹을게."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을 꺼내지도 않고 택운이 돌아섰다. 눈가가 붉어져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건 택운이 아닌 재환이었다. 

"형, 화 안 내?"

문고리를 돌리는 택운의 손을 잡았다. 동그란 눈을 잔뜩 일그리고 귀여운 눈썹을 축 늘여뜨린 게 귀여워 택운은 원식의 타액이 남아 번들거리는 입가를 쓸었다.

"내가 왜 화를 내. 날 떠날거야?"

"....아니..."

"그것 봐. 내 곁에 있을거잖아. 결국엔 내 옆으로 와서 잠이 들고, 매일 아침 내 곁에서 눈을 뜰 꺼잖아."

입술을 내렸다. 평소라면 그저 바라만 보았을 입술이 어쩐지 더 탐스러워보여 실로 오랜만에 재환을 맛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먼 과거, 그의 처음을 떠올리게 해 뺨을 톡톡 두들겼다.

"이따 집에서 보자."

택운이 완전히 문을 나서고 재환은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 반과 화를 내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오히려 화가 나 눈을 번뜩이는 건 원식이었다. 입맞춤으로 인해 부어버린 입술을 또다시 꾹꾹 눌러버리는 재환을 바라보던 원식이 탁자에 반쯤 기대어져 있던 몸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밤마다 돌아갈거야? 사랑하니까? 나랑 하는 건 사랑이 맞아?"

"사랑해. 맞아, 너도 형도, 사랑이 맞아."

"이재환 너 진짜,"

"그래서 떠날거야?"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재환이 원식을 바라보았다.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지 터져버린 눈물이 동그란 뺨을 따라 좁은 턱으로 떨어졌다. 원식이 좋아하는 브라운 빛깔의 눈동자가 물을 먹어 반들거렸다.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화가 나 박박 갈던 이에 힘을 풀고 재환의 앞에 마주섰다.

"....아니. 내가 어떻게 떠나."

뺨을 그러쥐었다. 입술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사랑한다. 냉정의 심연에 가라앉아 버린 택운을 놓지 못하고 원식을 향해 손을 뻗는 재환을 사랑한다. 그가 가라앉지 않도록 파동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원식은 만족한다. 제가 보낸 물결에 재환이 흔들리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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