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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합작

[랍켄] COVER UP

愛煥 2018. 6. 18. 00:13
1.

하얀 붕대가 감긴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풀었다. 찢겨진 손바닥이 아파오는 것 같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기 오작동으로 인해 길게  뽑혀나오던 바늘은 전원이 꺼진 것으로 착각하고 뻗어진 원식의 손을 깊게도 찔러댔다. 제 몸 곳곳에 타투가 있고 직접 새긴 전적도 있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려 했다. 피까지 흐르는 손을 본 홍빈에 의해 응급실에 떠밀려 오기 직전까지 손수건으로 대충 지혈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상처난 손이 왼손이라 작업에 지장이 없는 것과 오작동이 잦은 기기라 잉크가 삽입되어 있지 않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며 원식은 붕대로 인해 두툼해진 손을 바지주머니에 욱여넣는 것을 포기했다. 항생제와 연고를 처방받고 긴다리를 휘적이는 원식은 시끄러운 응급실 한 편 홀로 고요한 침대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턴으로 처음 온 날 내가 처음 만난 환자가 누군지 알아요?"

"형이에요, 형. 이제 내가 5년찬데 매주 처음 만나는 환자가 형인 것 같네. 응급실 VIP되시겠어요."

"그만 좀 아픕시다, 예? 어째 우리집 강아지보다 형 얼굴을 더 자주 봐."

대답하는 목소리를 하나도 없건만 어린 티를 미처 지우지 못한 목소리가 홀로 떠들었다. 살짝 벌어진 커텐 사이로 의미없이 던진 시선이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와 그 앞에 앉은 또 다른 남자의 등으로 떨어졌다. 왼손을 의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맡긴 남자는 손목에 거즈를 대고 붕대로 고정하는 일련의 과정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달랑이는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됐으면 가도 돼?"

"네. 제발 좀 우리 그만 봅시다.  형 보고 싶으면 내가 카페로 갈게, 응급실에선 그만 봐요. 약속. 약속했다? 응?"

여전히 답 없는 남자가 두 다리를 바닥에 지탱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답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지 의사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마른 몸이 돌아가고 곧 동그란 뒷통수의 주인공과 두 눈이 마주했다. 화들짝 놀라 그저 지나가고 있던 것처럼 발걸음을 옮긴 원식은 작업실로 되돌아가는 와중에도 그 얼굴을 곱씹었다. 높은 코와 쌍커풀이 진 동그란 눈. 도톰한 입술. 하얀 얼굴. 하얗게 굳은. 얼굴.


2.

작업 노트에 그림을 끄적였다. 옆구리에 자리한 천사는 얼추 모습을 갖추었으나 그 얼굴만큼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처음 타투를 디자인할 때 그렸던 그림을 조금씩 수정하다보니 천사의 얼굴은 응급실에서 보았던 그 남자를 닮았다.

"미소 짓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몇 번을 수정해도 천사의 웃는 얼굴을 그릴 수 없어 펜을 놓았다. 밀랍인형 같던 그 얼굴이 미소짓는 것을 원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잠시 보았던 그 얼굴이 지금 내가 그리는 이 얼굴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얼굴 부분 수정하게?"

어깨 너머로 불쑥 홍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붕대가 감긴 왼손 근처에 놓여지는 커피를 들어 빨대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 얼굴 계속 비워둘 순 없잖아. 날개쪽  리터칭도 좀 할 겸 슬슬 손 대야지."

"오늘 할거야?"

홍빈이 당장이라도 준비할 기세로 바늘을 꺼내들었다. 찡그려지는 눈을 보며 즐겁다는 듯 음푹 패이는 보조개가 얄밉다.

"아직. 얼굴이 잘 안 떠올라."

바늘이 무서워 주사 맞는 것도 싫어하던 김원식이 어느새 다 커서 타투를 한다고, 몇년 된 놀림감 레파토리를 늘어 놓으려던 홍빈은 노트에 떨어지는 원식의 시선을 따라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 앞에 카페 알바생 닮은 거 같다, 야."

쪼로록- 툭 던져지는 낮은 목소리 끝으로 빨대가 크게 울렸다. 놀랄만큼 큰 소리도 아니었건만 원식은 고개를 쳐들었다. 동그랗게 커진 두 눈에 홍빈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살짝 흔들었다. 찰랑이는 커피 위로 카페 로고가 일렁였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가는데?"

"커피사러-"

"야 내가 사온 건 커피가 아니고 콩물이냐? 야!"

황당하다는 듯 커질대로 커진 홍빈의 두 눈이 안봐도 훤해 원식은 긴 다리로 내달렸다. 작업실에서 칩거하듯 생활하는 원식이 그 언젠가 '새로 생기려나보네-' 했던 작은 카페는 손님들로 복작이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 서 있자니 본 적 있는 동그란 뒷통수가 살랑이다 원식을 향해 돌아섰다.

"주문 하시겠어요?"

본 적 있는 얼굴, 들은 적 있는 목소리, 처음 보는 잔잔한 미소. 천천히 숨을 삼켰다. 부산스레 눈을 굴려 금빛으로 빛나는 명찰을 훑었다. '이 재 환'. 이름이 재환이구나, 이재환. 그때 본 그 얼굴이 맞네. 그 목소리도 맞고. 심지어 웃고 있다.

"손님? 주문 하시겠어요?"

"아, 네. 김원식이요."

"...네?"

가느다란 목이 살짝 기울어졌다. 되묻는 입술이 오물거리다 살짝 벌어진다. 눈이 갈색이네. 머리카락도 갈색이고. 한참을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터무니없는 주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동그란 손끝이 다가와 손등을 스쳤다. 카드를 가져가 결제를 하고 영수증과 카드를 건넨 후, 진동벨까지 건네주고 재환이 등을 돌리고 나서야 원식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아니, 뱉어지는 숨에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커피를 제일 큰 사이즈로 한 손에 들고 작업실로 돌아온 원식은 홍빈이 사다놓은 커피까지 한번에 빨대 두 개를 물고 마셨다. 차가운 커피를 들이켜도 열이 오른 뺨을 식지않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급하게 마신 커피탓인가.


3.

노트의 천사를 수십 번 그려보아도 원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재환이 미소짓는 것을 보았지만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릴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어대며 재환을 보아도 천사를 완성시킬 수 없었다. 카운터에서 등을 돌리는 재환의 얼굴은 다시금 하얗게 굳어져버렸기에. 매일 같이 보는 재환의 미소는 진짜가 아니기에. 원식은 그림 속 천사를 미소짓게 만들 수 없었다.

손바닥을 전부 가렸던 붕대를 풀고 작은 거즈를 붙였다. 이전보다는 움직임이 수월해 재환의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딸랑- 울리는 종소리마저 오늘따라 가벼운 것 같아 살살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어서오세요- 하는 재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카페를 찾는 점심 시간보다 이른 방문을 한 탓에 아직 재환이 출근하지 않은 걸까. 한적한 카페를 한번 돌아보고 카운터 앞에 서 있자니 카운터 뒷쪽 비품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재환!"

여간해선 큰소리를 내지 않는 카페 사장 택운의 목소리였다. 놀람과 함께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원식은 카운터 뒤로 몸을 뺐다. 실수했나. 실수해도 혼내는 거 본 적 없는데.

"제발 그만하자. 너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니까? 저번에 그런지 얼마나 됐다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병원가자."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던 택운이 재환의 손목을 쥐고 비품실에서 나왔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덕에 이미 얼굴을 터버린 원식이 어색하게 목례를 건네니 택운은 성큼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원식의 주문을 받고 카페를 비워야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원식의 등 뒤로 종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건지 간단한 브런치를 먹으려는 손님이 하나 둘 들어섰다.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택운의 손 사이로 붙잡힌 재환의 손목에서 핏물이 비쳤다.

"제가,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병원?"


4.

그리 깊지는 않은 상처를 소독하고 겨우 붕대를 풀었던 손목에 다시금 커다란 반창고가 붙었다. 소독 한번에 상혁의 잔소리를 잔뜩 들은 재환은 지친 발을 질질 끌며 복도에 나섰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원식이 황급히 재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계셨네요, 손님."

"김원식이요."

"네, 원식씨-"

힘없는 웃음과 함께 살짝 들려있던 왼손을 툭 떨군 재환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보여줘서 좋을 것 없는 치부를, 구태여 알릴 필요 없는 사람에게 들킨 것 같아 재환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억지로 웃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시선을 피하는 눈을 쫒으며 원식이 재환 대신 미소를 지었다. 왼손을 끌어와 반창고 위를 살살 쓸었다. 희미한 미소가 잦아들고 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사실, 전에 응급실에서 재환씨 본 적 있어요. 내 앞에서는 힘들게 웃어주지 않아도 돼요."

재환이 두 눈을 천천히 감아내렸다 떠올렸다. 하얗게 굳어진 얼굴이 영 어색하지 않아 원식은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마른 손이 매섭게 원식을 내쳤다.

"그래서 내가, 불쌍해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 카페에 매일 온 거고? 내가 웃는 거 보고 속으로 비웃었겠다. 그쵸?"

"아뇨. 아니에요. 그냥, 궁금했어요. 자꾸 재환씨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우연히 그 카페에 재환씨가 있다는 걸 알고 보고싶어서 간 거에요. 난 재환씨가 궁금하니까, 보고싶어서."

다시금 손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반창고의 거친 면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마저 내치지 못한 재환은 원식의 손 위에서 힘을 풀어내며 손목을 내맡겼다. 받아들이기보단 포기에 가까운 몸짓이었지만 원식은 조금 더 재환에게 붙어섰다.

"나는 김원식이에요."

"알아요."

"스물여섯이고, 타투이스트에요. 재환씨 일하는 카페 근처에 작업실에서 친구랑 둘이 일해요. 이거, 손목에 이거 제가 왼손으로 그려보다가 망해서, 친구가 리터칭해준거에요. 여기보면 여기 이부분, 여기 라인 엉망이죠? 여기 제가 왼손으로 그린 부분이에요."

원식이 손목을 들이댔다. 여기여기- 길다란 손가락이 위치를 가리키고 낮은 목소리가 살펴봐주길 바라는 것 같아 재환은 저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찌푸리며 원식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화려하고 조금은 무섭게 생긴 것 같기도 한 포세이돈의 머리칼 사이, 숨겨진 라인이 삐뚤빼뚤 제각기 방향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픽- 웃음이라 할 수 없는 작은 웃음이 터지고 두 눈을 들었다가 꽤나 가까이에 놓인 원식의 눈을 마주했다. 눈꼬리가 쳐진 눈이 매서운 전체적인 인상과는 달리 순박했다.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원식의 손목 위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나를 말했는데, 재환씨도 말해줘요- 하는 듯한 눈빛애 입안이 써지는 것 같았다.

"이쟤환."

"알아요."

"스물일곱."

"형이었어요??"

"한상혁은 나보고 자살중독이래요."

"..."

"근데 그 말을 틀려요. 난 죽고 싶어서 손목을 긋는 게 아니거든."

"..."

"살고 싶어서 긋는 거에요. 내가 살아 있고 싶어서."


5.

"형, 안녕하세요-"

원식이 카페문을 열어젖히며 손을 흔들었다. 재환을 무사히 병원까지 에스코트 한 뒤로 원식은 택운과도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의식적인 미소 아니면 하얀 무표정밖에 없는 재환의 얼굴에 또 다른 표정을 스치게 할 수 있는 원식을, 택운은 신기해 했고 반가워 했다.

"재환아. 퇴근하면 나랑 저녁 먹자-"

"형이거든."

그 또 다른 표정은 귀찮음과 질림의 표정이었지만. 

나 빠른연생이라 우리 동갑이야~ 라며 징징대는 원식의 입에 커피 빨대를 물린 재환이 비품실로 들어섰다. 카운터에서 등을 돌렸음에도 입가에 미미하게 남은 미소에 택운은 티라미수 케이크  두 조각을 포장해 원식에게 안겼다. 

"저녁 먹고 케이크 먹어. 케이크 먼저 먹으면 재환이 밥 못 먹어."

"넵. 장인어른."

능청을 떠는 원식의 얼굴 앞에 푸흡- 웃음을 뱉어버린 사이 재환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낄낄거리는 원식의 얼굴 앞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치켜세워보인 재환이 원식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재환아! 다시 해봐! 방금 너 입은 티셔츠에 애기랑 엄청 똑같앴어! 응? 한번만 더 해봐~"

시끄러운 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졌다. 달라붙는 원식을 떼어내기 위해 팔을 휘두르면 익숙하게 팔을 잡아챈 원식이 손목의 반창고를 쓰다듬는다. 재환의 무기력을, 채울 수 없는 그 공허함을, 원식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조금씩 채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진짜 재환의 아버지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택운은 급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으- 징그러. 방금 소름 돋았어. 민율이 사진이나 봐야지.


6.

작업실에 초대하는 것을 몇 번이고 거절하던 재환을 드디어 작업실로 이끌었다. 제가 하는 일울 보여주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원식의 얼굴을 밀어내고 또 밀어내다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원식을 떼어냈던 재환은 네온 간판이 어지럽게 밝히고 있는 계단을 내려와 지하 작업실로 들어섰다. 고객 상담을 하거나 원식이 타투 디자인을 하는 둥근 탁자 위에 케이크를 내려둔 원식은 신이 나서 제 작업물을 자랑했다. 이건 저번에 오셨던 고객님 사진인데 별자리에 탄생석 합쳐서 그린거야. 이건 내 손목에 있는 거. 내가 디자인하고 친구가 해줬어. 그리고 이건 흉터 커버업으로 한건데...

조잘대는 원식의 낮은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재환은 맥주캔을 땄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자니 신이 난 원식은 제 몸에 있는 모든 타투를 보여줄 기세였다. 훌러덩 티셔츠까지 벗어던지고 쇄골이며 등, 팔뚝에 자리한 타투에 대해 설명하느라 원식이 이리저리 몸을 돌렸다.

"옆구리는 뭐야?"

커다란 날개가 옆구리를 감싸고 있었다. 천사인가? 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타투를 살피는데 타투는 미완성인 듯 얼굴이 비어있었다. 반쯤 펼친 날개는 금방이라도 날개를 움직일 것 같았다. 원식이 몸을 움직일때마다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생동감 있는 날개에 반해 텅 비어버린 얼굴이 아쉬워 재환은 캔맥주를 한모금 더 넘겼다.

"텅 비었네."

"가장 예쁜 미소를 그려넣고 싶은데 아직 못 그렸어."

"왜?"

"아직 못 봤거든. 진짜 미소."

언제 신이 났었냐는 듯 원식이 재환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어느새 한 캔을 비운건지 다른 한 캔을 따내는 재환은 가만 바라보던 원식이 습관처럼 재환의 손목을 어루어만졌다.

"언제 낫는데? 그 의사선생님 돌팔이인가?"

"다 나았어. 충동적으로 그런거라 별로 깊게 긋지도 않았었구."

"그런데 왜 반창고 안 떼어?"

"...보기 흉할테니까."

재환이 원식의 손을 피해 손목을 숨겼다. 시선을 돌리며 캔을 무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 없어 원식도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재환의 뺨이 조금은 붉었다. 재환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 탁자 위에 손가락만 구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전에 그 말. 설명해줄 수 있어? 살아 있고 싶어서, 상처낸다는 그 말."

허공을 배회하던 재환의 눈이 원식을 향해 돌아왔다. 잠시간 굳어졌던 얼굴은 이내 조금은 편히 풀어졌다. 그래. 너는 너에 대해 다 말해주는데 내가 너무 입 다물고 있으면 안되겟지? 딱히 숨길 이야기도 아니고 말이야. 맥주를 마저 비운 재환이 탁자 위에 엎드렸다. 옆으로 돌린 고개에 높은 콧대가 바로 보여 원식은 머릿속 연습장을 꺼내 재환의 옆얼굴을 찬찬히 그려넣었다. 나른한 두 눈이 김겨내렸다.

"난 고아원에서 자랐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공기 중에 음표를 그려내고 차가운 탁자 위로 떨어졌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난 고아원에서 지냈어. 부모님이 보고싶었겠다고? 아니- 부모의 얼굴을 알 턱이 없는데 보고싶을리가. 난 그런거 몰라. 왕수녀님은 내가 불쌍하다고 했어. 가슴 속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생겨 내가 낼 줄 아는 소리라고는 텅 빈 바람소리 뿐이라고 날 볼 때마다 우셨어. 그런데 난 정말 슬프지 않았어. 수녀님 말씀처럼 춥지도 않았어. 외롭지도 않았어. 난 매일 같은 하루를 보냈어. 아침에 일어나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하늘이 붉게 물들어. 붉어져버린 하늘 위에 어느 심술쟁이가 검은 물감을 뿌려버리면 난 다시 파란 하늘이 깨어날 때까지 꿈 속으로 도망가곤 했어. 사실 꿈이랄 것도 없었어. 웃기지? 어둠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어둠으로 숨는다는게?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몸에 상처가 났어. 내가 매일 마루 한 구석에 앉아 있는 걸 싫어하던 애가 있었거든. 걸리적거리니까 비키라고 나를 밀쳤는데 그대로 마당으로 떨어져서 무릎이 깨졌어. 하늘처럼 무릎이 붉게 물드는데 무릎에서 심장이 울리는거야. 두근두근. 처음이었어. 내 심장을 내가 느끼는 게. 엄청 신기했어. 내 무릎은 붉게 물들은 후에도 누군가 검은 물감을 뿌리지도 않았어. 그래서 좋았어. 상처에서 열이 오르고 따뜻한 피가 흐르고 벌어진 상처가 나아가면서 두근두근 울리고 간지러운게. 너무 좋았어. 너무 좋아. 그래서 긋는거야. 내가 인형이나 시체같은 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확인하려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재환이 세번째 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아챈 원식이 반창고를 매만졌다.

"이재환은 살아있는데. 이거봐. 따뜻하고 말랑말랑한데."

"...그러게."

"난 매일 내가 살아있는 걸 느껴. 너도 그렇잖아. 나랑 있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

"..."

"전에 카페에서 충동적으로 그런 이후로. 한번도 안 그랬잖아. 그치?"

잡힌 손을 포기하고 다른 손으로 맥주를 집어들던 재환이 손을 멈추었다. 눈 밑이 평소보다 더욱 붉어진 재환이 멍하니 원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살 쓰다듬던 손을 세워 반창고를 떼어냈다. 몇번을 상처를 내고 피를 흘렀을까. 새하얀 손목 위로 짙은 흉터가 여러번 덧그어저 있었다. 시간이 흘러 흐려진 흉터 위로 조금씩 선명해지는 흉터들. 그 가장 위에는 이제 막 살이 차올라 여전히 붉은 상처가 있었다.

"심장이 뛰면, 살아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

"...심장이 뛰는 걸 느끼고 싶어서 상처를 내는 건데."

"그러니까.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면. 상처 내는 거 그만할 수 있겠어?"

반창고 위로 느껴지던 원식의 손이 직접적으로 닿아왔다. 나아가는 상처가 쓰릴 리 없건만 원식의 손이 스치는 곳이 화끈거려왔다. 잡힌 손을 빼려는 듯 힘을 주는 재환을 어렵지 않게 저지했다. 어린 아이가 하듯 호오- 입바람을 불어보던 원식이 손목 위로 입술을 내렸다. 입술이 닿은 곳에서 열이 올랐다. 두근두근. 심장고동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물어뜯는 손가락 끝에도 촉, 촉. 가벼운 입맞춤이 앉았다. 

"응? 형. 재환아."

"...하나만 해."

손목이 당겨졌다. 옆으로 다가 선 원식의 탄탄한 배에 얼굴을 파묻어버린 재환이 급한 숨을 들이켰다. 원식의 향이 온 몸을 가득 채워 몸이 풍선처럼 부푸는 것 같았다. 간만에 나온 형이란 호칭에 불퉁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낮은 웃음이 정수리로 떨어젔다.

"내 심장소리 들려? 난 살아있어. 너는?"

분명 원식의 품에 안겨있건만 원식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울렸다. 쿵쿵 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원식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던 손가락과 손목에서 옮겨온 심장에 지배당한 듯 온 몸이 울렸다. 열이 올랐다. 아찔해진 눈 앞에 꾸욱 눈을 감아보자니 재환아. 너는? 재촉하는 목소리가 한번 더 울렸다. 끄덕.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살아있음을 느껴. 너로 인해. 매일 똑같은 일상이 너 때문에 변했어. 니가 울리는 종소리를 기다리고 니가 올 시간 쯔음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먼저 입력해 놓고 기다려. 어쩌다 네가 늦어서 다른 손님이 먼저 오시면 얼마나 기분 나쁜지 몰라. 과도를 보고도 손목을 긋고 싶다는 생각이 안든 것도 너를 만나고 처음이야. 상처를 내지 않아도, 흐르는 피를 보지않아도 충분히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었어. 많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애 흩어지는 정신을 원식이 양손 가득 움켜쥐었다. 뺨을 그러쥐는 손에 꾸욱 감았던 눈을 슬몃 떠올리니 미소 짓고 있는 원식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이다."

뭐가? 라고 묻기 전에 손가락과 손목에 머물렀던 심장이 입술로 옮겨왔다.


7.

"반창고 또 붙였네?"

"상처낸 거 아니야."

"알아. 그냥 떼어버리지 불편하게."

카페에서 퇴근한 재환이 곧장 원식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제가 만들어 온 커피를 테이블에 올린 재환이 제 몫의 초코라떼를 주욱 빨아들였다. 보기 흉하잖아. 대수롭잖게 말하며 눈치 좋게 작업실을 나서는 홍빈의 등 뒤로 손을 저어주었다.

"타투할래?"

"...?"

"흉터 커버업. 타투로 자주 해, 사람들이."

"글쎄...굳이..."

"너 손목 진짜 이쁜 거 모르지. 엄청 가늘고 쭉 뻗어서 되게 섹시해. 손목 안쪽도 엄청 하얘가지구 여기 손목뼈는 분홍색이구. 볼때마다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리고 싶..."

"아! 시끄러워!"

"할꺼지, 타투?"

"...그래그래. 해줘. 예쁘게."

포기하는 듯한 표정으로 재환이 털썩 주저앉았다. 왼쪽 손목 위에 자리한 반창고를 떼어낸 원식이 예전부터 그리고 싶은 게 있었다는 듯 손목위로 펜을 놀렸다. 길다란 흉터들이 줄기가 되고 그 끝에 장미가 피었다. 난도질 당한 손목에 피어난 장미꽃 한 다발에 빨대만 질겅이던 재환이 제 손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컬러로 해줄게. 줄기는 짙은 녹색으로 할거고, 장미는 붉은 색으로. 예쁘겠지?"

"응. 예쁘겠다."

"다 하고 나면 피부가 좀 붉어질거야. 그런데 그 위로 검은 물감 뿌리는 심술쟁이는 없으니까."

"응. 진짜 예쁠거야."

장미를 바라보던 재환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원식의 두 눈이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어 웃음이 샜다. 녹아내린 하얀 얼굴이 말랑이는 웃음을 지었다.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와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 밀려 동그랗게 뭉쳐지는 뺨. 원식의 옆구리에 새겨진 천사와 꼭 닮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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