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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합작

[택켄] 달의 눈물

愛煥 2018. 8. 12. 00:35

‘형은 빗방울 같아요. 젖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보면 흠뻑 젖어있게 만드는.’

세로로 긴 창, 하늘거리는 얇은 커튼, 밤을 닮은 그랜드피아노, 그리고 ...



달의 눈물

w. 애환



눈을 떴다. 여즉 세상을 점령한 밤이 물러나지 않아 주변이 어둑했다. 홀로 눕기엔 넓은 침대에서 일어나 누웠던 흔적 없이 깨끗한 반대편 끝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달빛을 받아 하얗게 번지는 문을 열어 거실로 나서면, 커튼 한 조각 걸려있지 않아 달빛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피아노가 보였다.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새하얀 빛을 발하는 그랜드피아노. 그 위에는 취향의 주인이 미소 지으며 앉아 있었다. 새하얀 액자 속 익숙한 미소. 피아노에 앉아 그 미소를 바라보자니 미소는 점차 다른 사람을 그렸다.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은 미소. 굳게 닫힌 뚜껑을 열지 못해 그 위를 두들겼다. 수 천 번을 연주해 이미 외워버린 악보와 건반의 위치에 그 위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


피아노 한 대가 겨우 놓이는 좁은 연습실. 택운은 창을 등지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몇 달 뒤에 있을 콩쿨에서 연주할 곡을 고르지 못해 그의 주변엔 여러 악보들이 즐비했다. 한 곡을 정해서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연습해야 할 텐데. 한숨이 절로 나와 손끝에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문득 창밖을 비춰내는 피아노에 달이 떴다. 입을 벌린 피아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달을 바라보다 두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건반을 두들겨 멜로디를 만들었다.

‘그 노래, 나 알아요. 들어본 적 있어.’

피아노 위를 춤추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멋쩍게 웃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학교에 혼자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리길래 ...’

카디건 소매만 죽죽 잡아당기던 소년이 문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가 발보다 먼저 택운에게 다가섰다.

‘제목이 뭐예요? 멜로디만 알고 제목은 몰라서.’

‘월광 소나타.’

‘아아- 맞다. 들어가도 돼요?’

기억이 난 듯 아아- 해보이지만 몰랐던 게 분명한 소년이 눈을 굴렸다. 이미 들어왔으면서... 속으로만 웅얼거리며 옆으로 비켜 자리를 조금 내어주니 냉큼 기다란 의자 옆에 엉덩이를 붙이는 소년에게선 약하게 유화 향이 났다. 건반을 만지지는 않고 가만 들여다보기에 택운이 손가락을 올렸다. 동그란 눈이 잔뜩 기대를 품고 택운을 올려다보았다. 피아노 위에 뜨던 달이 소년의 눈으로 옮겨갔다. 


재환은 택운보다 2살 아래였으며 미술부였다. 3층에 위치한 미술부의 작업실에서 택운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4층으로 올라왔노라, ‘귀신인 줄 알고 엄청 긴장하면서 올라왔어요―’ 하며 배시시 웃었다. 멜로디를 알고 있다곤 하나 재환이 알고 있는 멜로디는 1악장뿐인 듯 했다. 1악장과는 달리 밝은 느낌의 2악장을 들으며 ‘처음부터 이 멜로디가 들렸으면 귀신이라고 생각은 안 했을 텐데!’ 입술을 조금 불퉁였다. 대답 없이 연주를 이어가며 택운의 재환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멜로디가 아니었으면,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아니었으면, 내가 있는 곳에 안 와봤을거잖아.


***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햇살이 뜨거웠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꺼려져 택운은 한참을 창문 앞에 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곧 재촉하는 듯 벨소리가 울렸다.

-귀찮아-

화면 가득 뜨는 이름에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

‘또 나오기 싫어서 창밖만 보고 있지? 빨리 나와, 집 앞 카페까지 와줬으면 군말 말고 나와라!’

“지금 갈 거야.”

잔소리가 이어질까 싶어 급하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운동화를 신고 신발코를 콩콩 두들겼다. 주머니 속 전화가 한 번 더 울려오기에 힘주어 문을 열었다. 

간다, 간다고.


***


콩콩- 경쾌한 소리가 났다. 신나게 계단을 오른 재환이 신발코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혹여 피아노 소리에 그 소리가 묻혀버릴까 연주하던 손을 멈추었다. 재환의 발소리에 맞춰 건반 위를 손톱으로만 두들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상해!’

‘뭐가?’

‘형 피아노 소리를 듣고 올라오는 건데, 4층에 도착하면 연주가 뚝 끊기잖아요. 어떻게 매번 그러지?’

‘니가 너무 시끄럽게 걸어서 연주를 할 수가 없어.’

‘별로 안 시끄럽거든요! 앉아도 되죠?’

‘이미 엉덩이 들이밀어 놓고.’

‘헤헤- 월광 소나타 쳐주세요.’

‘왜 매번 그거야? 그 곡밖에 몰라?’

‘그냥- 멋있으니까-’

택운이 익숙한 음계를 그렸다. 재환 덕에 콩쿨곡은 월광 소나타로 정해진지 오래였다. 택운의 손을 따라 재환이 허공을 두들겼다. 끝이 동그란 손은 피아노를 연주하기에도 예쁜 손이었다.

‘연주해볼래?’

‘나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

‘알려줄게.’

재환의 등 너머로 택운의 팔이 둘러졌다. 한 옥타브 위에서 음을 누르면 재환의 손이 그 음을 따랐다. 두어 번 따라하던 재환은 곧 더듬더듬 멜로디를 연주했다. 어색하게 움직이는 재환의 손을 바라보며 택운이 왼손을 들어 반주를 더했다. 더듬거리는 재환에 의해 조금씩 끊어지지만 천천히 이어지는 곡. 택운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재환의 접힌 눈꼬리에도, 동글게 부풀려지는 뺨에도, 새하얀 달이 떠올랐다.


***


“그래서 피아노는 이제 영영 안 칠거야?”

“글쎄... 아직은 치고 싶지 않아.”

원식이 한숨을 내뱉으며 빨대를 물었다. 답답한 속에 커피만 마시고 있자니 어느새 커피는 바닥을 보이며 빈 소리만 낼 뿐이었다.

“괜히 피아노 탓하고 있는 건 아니고?”

“뭐?”

“위험 할 수도 있다고, 형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병원에 있으라고 했는데 괜히 말 안 듣고 고집 피우다가...!”

“말조심해.”

택운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집스레 다물리는 입술에 원식은 뒷머리를 흩트렸다. 습관적으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 그래. 마음대로 해. 나도 지친다, 형.”


***


드디어 콩쿨날이 밝았다. 잘 다려진 셔츠 위에 연미복을 걸쳤다. 구태여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한 악보를 한번 들여다보고 허공 위에 손가락을 굴렸다. 대기실 소파 위에 대충 던져둔 휴대폰이 울렸다. 

-우리 재환이- 

누군가 보았다면 간지럽다 비웃을 이름이 떠올랐다.

‘와! 방금 화장실 가다가 참가자 한 분 봤는데 엄청 멋있는 옷 입었어! 형도 멋있는 거 입었어요?’

‘카메라로 찍어도 돼요? 안되려나?’

‘아, 형이 싫으면 안 찍을게요. 대신 내 눈에 어어엄청 찍어놔야징!’

‘헉 곧 시작한대요!’

‘형, 나 넘 떨려요ㅠㄴㅠ’

무대는 내가 올라가는데 왜 네가 떨려. 피식 웃음이 나 빛을 발하는 휴대폰 화면이 재환의 뺨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첫 번째 참가자의 연주와 함께 웅웅 울리던 휴대폰이 멎었다. 재환의 문자가 끊기니 조금씩 긴장이 되는 것 같아 다시 허공을 두들겼다. 머릿속으로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자니 하얀 벽 위로 재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천히 무대로 올랐다. 피아노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어두운 관객석에서 재환의 두 눈만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박수를 치고 있는 재환이 귀여워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억누르느라 입매가 단단해졌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풀고 수천 번을 연주했던 곡을 연주했다. 연습하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가 소나타를 바칠 달빛은 재환 하나였으므로 저를 평가할 또 다른 관객은 신경 쓸 것이 못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쥐고 연습실로 향했다. 봄과 여름 사이, 눅눅한 비가 내렸다. 구름에 가려 조금은 빛을 잃은 달이 아쉬웠지만 검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은 제 달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비를 맞았는지 하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걷어내며 물기에 젖은 뺨은 문질렀다.

‘형, 진짜 멋있었어요. 매일매일 멋있었는데, 오늘은 특히, 더.’

‘다 젖었네. 우산 안 들고 갔었어?’

‘비가 와요? 몰랐어요.’

‘뭐야- 바보야?’

‘젖는 줄도 몰랐는데... 형, 그러고 보니 형은 빗방울 같아요. 젖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보면 흠뻑 젖어있게 만드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갈빛의 달은 올곧게 택운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파랗게 질린 듯한 입술이 예쁜 미소를 그렸다. 택운은 제 손에 들고 있던 트로피를 재환에게로 넘겨주었다. 트로피를 받아들고 왜 저에게 주는지 모르겠다는 양 갸웃거려지는 턱을 두 손으로 쥐었다. 트로피보다 더욱 소중하게. 차가워진 입술을 핥았다. 고개를 틀어 파고들면 입술과는 달리 뜨겁게 달아오른 혀가 있었다.


***


벨소리에 놀란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전화로 제 평화를 깰 사람은 단 한명 뿐이라 택운은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저번에 까먹고 말 안했는데, 다음 주에 나 연주회 있어.”

“어쩌라고.”

“어쩌라고겠어? 오라고!”

“내가 왜.”

“아, 형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하나뿐인 동기인데! 형이랑 나랑만 동양인이어서 우리 둘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 진짜 야박하다, 정레오.”

“아, 알았어. 날짜 시간이나 문자로 찍어놔. 티켓 사라는 건 아니지?”

“내가 저녁 사줘서라도 모셔야지, 티켓은 얼어 죽을.”

“잘 아네.”

또 종일 누워만 있지말아라, 운동이라도 좀 해라, 밥 잘 챙겨먹어라-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잔소리에 영혼없이 대답하다 전화를 끊었다. 아침부터 기운을 뺀 것 같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면서도 시선은 새하얀 그랜드피아노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위의 사진으로. 아니, 그 사진 속 미소와 닮은 기억 저 너머 속 재환에게로.


***


‘미국에 있는 대학에 갈 것 같아.’

‘그래요? 잘 됐다, 그죠?’

‘9월 입학에 맞춰 가야해서 이번 학기 끝나면 미국으로 갈 거야.’

‘....형, 아직 졸업두 안했는데도요?’

‘저번 콩쿨 때, 그 학교 교수님이 심사위원이셨나봐. 그 교수님께 받은 추천서랑 교장선생님께 받은 추천서 통해서 갈 것 같아. 편의 봐주셔서 고등학교는 조기졸업으로 처리 될 거래.’

‘그렇구나...’

이제는 익숙해진 월광 소나타의 멜로디를 재환이 천천히 연주했다. 애써 택운을 피하려는 듯 고집스레 건반에 머무는 시선에 왼손으로 반주를 맞춰주던 택운이 손을 멈추었다.

‘아쉽다. 왼손도 알려 달라고 하려 했거든요.’

‘재환아.’

‘난 앞으로도 오른손 밖에 못 치겠네.’

‘알려줄게. 가기 전까지, 나중에 돌아와서도. ’

반짝- 재환이 고개를 들었다. 배시시 웃는 입술 끝에 입을 맞추니 도톰한 입술이 문을 열고 택운을 받아들였다.

‘꼭, 알려주기에요. 반쪽짜리는 멋없어.’

동그란 달꼬리 끝에 빗물이 조금 맺혔다.


콩쿨대회는 끝이 났지만, 택운은 연습실을 떠날 수 없었다. 당장 다음 달에 치룰 입학시험도 문제였지만 연습실을 찾지 않는 재환이 더 큰 문제였다. 항상 유화향을 달고 오면서 제 작업실이 어디인지는 알려준 적 없는 재환에 택운은 연습실을 나서 직접 재환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아니, 실은 두려웠다. 제가 떠나고 나면 떠오를지도 모를 태양에 애써 재환을 적셨던 빗방울이 모두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여름의 색이 짙어지고 있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자니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평소보다는 무거운 발소리지만 계단을 오른 후 신발코를 콩콩- 두들기는 것은 재환의 소리였다. 재환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복도로 나섰다. 품에 가득 캔버스를 든 재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있었어요? 피아노 소리가 안 나서 간 줄 알았는데...’

‘그 동안 왜 안 왔어?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화났어?’

‘그런 거 아니에요. 바빴는데, 나도!’

재환의 눈썹이 휘어졌다. 억울함을 온 몸으로 표현해대기에 불만을 담아 꼬았던 팔을 풀었다. 캔버스를 들고 있는 하얀 팔이 힘겨워보여 손을 내미니 재환이 그림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 금빛 달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맑은 하늘처럼 보이지만 비라도 내리는 양 축축한 느낌.

‘달이네. 비 오고 있는 것 같아.’

‘역시, 형은 알아줄거라 생각했어요.’

재환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서 내밀고 있는 팔에 택운이 천천히 그림을 받아들었다.

‘형이 연주하는 월광 소나타. 들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에요. 형한테 주고 싶어서. 곧 ... 멀리 갈거니까-’


***


언제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정장을 꺼냈다. 매일 신는 운동화 대신 검은 구두까지 갖춰 신고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깔끔히 넘길까 잠시 거울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돌렸다. 대충 손으로 쓸어 올린 머리카락이 다시 눈을 가려왔지만 애써 세상을 선명히 볼 이유는 없었다.


원식의 연주회는 꽤나 큰 아트홀에서 열렸다. 벽면에는 바이올린을 든 원식의 사진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개인연주회인데도 규모가 꽤 크다 생각하며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형, 나 지금 샵에서 출발했는데 조금만 기다렸다가 무대 뒤로 와!’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할 것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랜만에 아트홀을 찾은 만큼 주변 구경이나 조금 하다가자 하는 마음에 천천히 회장을 걸었다. 연주회가 열리는 홀의 아래층은 사진이나 그림들의 전시회가 열리는 듯 했다. 그림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기에 지나치는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넓지 못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무언가가 스쳤다. 회장에서 날 리 없는 유화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것 같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 커다란 금빛의 달. 비를 머금은 축축한 달. 벽에 걸린 홍보물로 다가섰다. 

‘달의 눈물. 이재환 作’

유화냄새가 조금 더 짙어졌다.


***


‘제목이 뭔 지 알겠어요?’

‘글쎄...’

‘다음에, 월광 소나타 왼손까지 다 알려주면, 그때 나도 알려줄게요.’

그 말에 대답을 했던가. 그래- 라고 했던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재환의 그림을 받은 그 날로부터 사흘 후, 택운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 올랐다. 저를 추천한 교수님 덕에 원활한 학교생활을 이어가는 듯 했지만 동양인으로서 쉬운 타지 생활은 아니었다. 악보는 찢겨있을 때도 종종 있었고, 택운의 악보집에는 누가 그려놨는지 모를 가늘게 찢긴 눈 그림이 있었다.


‘Fuck you다 개새끼들아!’

조롱이 명백한 낙서를 지울 생각도 않고 들고 다닌지도 한 달, 드넓은 캠퍼스에서 욕지거리가 들렸다. 하얀 티셔츠에 케첩을 범벅하고 선 남자는 제 또래의 남자를 향해 중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누군가 주먹을 한번 내지르면 남자는 두 번, 세 번 내질렀다.

‘야이 씨발- 니들은 태닝할 때 케첩 바르고 하냐? 날씨도 존나 좋은데 니도 몸에 케첩 처바르고 태닝이나 하던가!’ 

널브러진 백인 남자의 머리 위에 케첩을 주욱 짠 남자는 씩씩 거리며 땅에 내려두었던 악기를 집어 들었다. 택운은 그냥, 오랜만에 들은 한국어가 반가워서 (비록 욕이 반이지만),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인 백인 남자가 우스워서, 그 남자의 뒤를 따랐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원식과는 다른 과였지만 둘은 곧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택운이 눈을 치켜드는 것만으로, 원식이 낮은 목소리로 한국의 쌍욕을 내뱉는 것만으로, 찌질하고 유치한 괴롭힘은 조금 줄어들었다. 


원식이 아세톤으로 벅벅 지워 검게 번진 악보집을 옆구리에 끼고 커피 잔을 입에 물었다. 곧 졸업 연주회가 있을 터라 택운은 다시 연습실로 향할 참이었다. 연주회 때 연주할 곡을 고르느라 잠을 설쳐 뻑뻑해진 두 눈을 벅벅 문지르는데 누군가 택운의 어깨를 두들겼다.

‘Excuse me, I want to go 어... 한인마ㅌ, 아니지, korean market. How can I get there?’

커다란 카메라를 멘 여자가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정신없이 쓸어 올리고 있었다. 장을 봐서 숙소에 들어가려는 여행객인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는 여자는 낯선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공포로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지도를 흘깃 건너 본 택운은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거기 그 한인마켓은 바가지 엄청 씌워요. 거기 말고 여기서 버스타고 10분만 가면 있는 대형마트로 가세요. 거기에도 한국 음식 파니까.’

답지 않는 친절을 베푼 택운은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여자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넸다. 막 돌아서려는 찰나 달달달 캐리어를 끌고 여자가 택운을 뒤따랐다.

‘한국분이시구나! 저 외국여행 처음이거든요! 파리에서 어제 여기로 넘어왔는데, 파리에서는 동생이랑 같이 다녀서 괜찮았거든요? 근데 혼자 다니려니까 엄청 무서운 거 있죠?’

마트에 간다며 왜 쫒아오지, 괜한 친절을 베풀었나 싶었다. 걸음걸이가 빠른지 거의 뛰다시피 하는 여자에 우뚝 멈춘 택운이 고개를 돌렸다. 가세요― 라 한마디 하려는 찰나,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닮았다. 누구랑? 누구였지? 택운의 눈이 가늘어지는 만큼 여자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래서 번호를 줬다- 이거야? 정택운이?’

덕분에 무사히 장을 보고 호텔 체크인까지 마쳤다는 재희의 문자를 확인하는 데 귓가에 원식의 목소리가 꽥꽥 울렸다. 낯가리기로는 원식보다 심한 택운이 별 일이라며 호들갑을 떤 원식이 의자를 주욱 빼 엉덩이를 내리며 물었다.

‘예뻐?’

‘예쁜 건 모르겠고, 닮았어.’

‘누구랑?’

‘...몰라.’


***


‘천재 화가 이재환의 첫 개인전.

장소 : **아트홀 3층

일시 : 04월 01일 ~ 04월 14일‘


재환의 사진하나 실리지 않아 검은 잉크가 새긴 이름만을 가만 바라보다 그 밑에 쓰인 작가소개란을 읽었다. ‘달의 눈물’로 화가에 등단, 새까맣게 모르던 사실이었다. 꿈의 시작을 도운 소중한 그림을 제게 주었던 것일까. 방 안 어딘가에 있을 그림을 떠올렸다. 커다랗고 밝은 달, 그 화창함에 반해 비라도 내리는 듯 습한 그림. 그 그림의 이름이 달의 눈물이었구나. 달이 울고 있는 거였구나. 

제게 주었던 그림의 제목을, 재환은 알려주지 않았다.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재회했을 때에도, 재환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애초에 택운이 묻지도 않았다. 그 그림을, 택운은 잊고 있었다. 방 한 구석, 어쩌면 여즉 풀지 않은 먼지 쌓인 박스 안, 켜켜이 먼지를 덮으며 잊혀졌을 그림, 잊혀졌을 이재환.


***


하루 종일 연습실에만 처박혀있는게 일과였던 택운은 재희의 관광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이곳저곳을 다녔다.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라는 재희는 항상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에 재희를 만나면 렌즈가 든 가방은 택운의 어깨에 걸리곤 했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동생이랑 다녔다며, 동생은 왜 같이 안 왔어?’

‘걔는 거기서 학교 다녀- 동생 보러간다는 핑계로 여행 온 건데, 나-’

재희가 배시시 웃었다. 나이로 따지면 택운보다 연상이었지만 재희가 짓는 미소는 한 없이 어렸다. 그래서 그런가, 가슴이 조금 간지럽고, 많이 따가웠다.

‘우리 동생, 그림 그린다? 고등학생 때 전국대회에서 최우수 받아서 화가로 등단도 했어. 대단하지?’

제 자랑이라도 하는 양 재희의 어깨가 치솟았다. 얼굴도 엄청 잘생겼는데 볼래? 카메라를 눈앞에 들이댈 기세라 택운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입 꼬리에 걸리고 어련하시겠어― 답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번졌다.


한 달을 계획하던 재희의 여행은 길어졌다. 관광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던 행동반경은 점차 택운의 오피스텔 주변으로 좁혀졌다. 걸을 때마다 스치던 두 손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꼭 쥐게 되었고,

‘계속 있고 싶은데 다른 건 몰라도 숙박비가 문제네-’

‘그럼 우리 집에 들어와. 방 남아.’

카페에 마주 않아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재희의 말에 택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 집, 방 한 켠을 내어주었다. 


재희를 보고 있자면 택운의 손은 단 하나의 곡을 연주하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희를 보면 떠오르는 곡조를 두 손이 자연스레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또 월광 소나타야?’

재희가 장난 섞인 타박에도 택운의 월광 소나타는 그칠 줄을 몰랐다.


택운은 유학을 마칠 생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교수님의 추천으로 규모 있는 오케스트라와 협업할 수 있었고 오케스트라의 퍼스트 바이올린 단장으로 있는 원식과 낸 앨범 덕에 이름을 알릴 수도 있었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아, 이것 좀 봐볼래?’

두 줄을 그리고 있는 재희의 임신 테스트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이쪽으로 온대. 한국 들어갈 때 같이 가자구-’

‘한국에서 보지, 처남 힘들게.’

‘벌써 처남이야? 암튼, 뭐. 임신한 누나 걱정돼서 달려 오신다는데 마다할 이유 없지이’

재환과의 재회는 한국에 들어가기 3일 전이었다.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재희만을 바라보다 크게 흔드는 손짓에 재희의 눈을 따라 돌린 고개 끝, 멍하니 멈추어버린 재환을 보았다.

‘재환아!’

뿌옇게 흐려진 기억 너머 이름이 재희의 목소리에 의해 수면으로 끌어올려졌다. 


셋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서 열심히 떠드는 건 재희 뿐이었다.

‘재환아, 왜 이렇게 못 먹어? 어디 아파?’

‘아니, 오래 비행하는 게 오랜만이라 피곤해서.’

이마를 짚으려는 재희의 손을 살며시 피한 재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작게 한숨지은 재희는 손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너 스테이크는 비워!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고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오랜만이네.’

그제야 택운이 입을 열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재환은 그나마 쥐고 있던 포크까지 내려놓았다.

‘그러게요. 10년만인데... 그대로네요, 형.’

‘너는... 좀 변한 것 같네.’

억지로 짓는 작은 미소가 전부인 재환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시종일관 바보처럼 웃느라 휘어져있던 눈꼬리가 날카롭게 굳어있었다. 웃지 않는 얼굴은 참으로 차갑구나 싶어 와인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래요? 하긴, 10년이나 지났으니까요.’

놓았던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적당히 익혀 촉촉한 스테이크가 뻑뻑해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씹어 물과 함께 넘기고 나니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재희가 돌아왔다. 

‘맛있지? 여기 스테이크 택운이가 좋아해- 잠은 우리 집에서 잘 거지?’

‘아니. 호텔 잡아뒀어.’

대답대신 웃음으로 때우던 재환이 급하게 답을 덧붙였다. 서서히 웃음이 사그라드는 재희에 눈썹을 일그러뜨리던 재환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신혼부부 깨 쏟아지는 거 옆에서 보고 싶지 않거든-’

‘아이, 무슨 깨가 쏟아진다구...’

얼굴을 붉히는 재희 모르게 재환은 휴대폰을 쥐었다. 그 손이 호텔의 빈 방을 검색하고 있음을 택운은 알 수 있었다. 


***


머리맡에서 울리는 전화벨에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올렸다. 여즉 풀지 못했던 박스를 뒤집어놓느라 엉망이 된 방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벽에 세워둔 그림에서 시선을 멈췄다. 물기서린 달빛. 소음을 내는 휴대폰을 귓가에 대었다.

‘야, 정레오! 어제 왜 그냥 갔어!’

“응, 원식아.”

‘응, 원식아- 할 때가 아니고오! 어제 아트홀까지 와놓고 왜 그냥 갔냐구우-’

“아... 너 연주회 갔었지, 내가.”

‘뭐냐. 내가 막 휘리릭 까먹어도 되는 존재냐?’

“나 어제 재환이... 개인전 한다는 포스터 봤다.”

‘재환이? 아... 재희 누나 동생? 그림 그린다는.’

“재희...”

‘아아- 알았다, 알았어. 형수님 동생.’

웅웅대는 낮은 목소리를 귓가에서 떨어뜨리며 그림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희 동생 재환이. 택운에게 재환은 단 한 번도 재희의 동생이 아니었다. 그냥 재환이었다. 한 층 아래 작업실에서 유화냄새를 풍기며 그림을 그리는 재환. 


***


한국에 오자마자 치르려던 결혼식은 재희에 의해 뒤로 연기되었다. 일생에 단 한번 입는 웨딩드레스인데 배가 불러서 입기는 싫다나. 조금씩 부르기 시작한 배를 살살 어루어만지며 웃는 재희에 택운은 못이기는 척 그 고집에 져주었다. 


‘어? 운아- 이거 너 고등학교 졸업장이야?’

늦은 점심을 재환까지 불러내 해결하고 한가롭게 거실에 드러누운 재희가 택운의 휴대폰 갤러리를 둘러보던 팔을 불쑥 내밀었다. 실제로 받아보진 못하고 부모님을 통해 사진으로만 보았던 졸업장 사진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아, 응. 조기졸업해서 내가 받아보진 못했고, 부모님이 사진으로 보내주신거.’

‘아아- 그런데 재환이랑 같은 고등학교네?’

소파 한 켠에 앉아 드로잉북만 뒤적이던 재환의 손이 멈추었다. 끝이 뾰족한 귀가 움찔 떨리는 것을 보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둘이 서로 몰랐어?’

‘아, 그게...’

‘그래? 몰랐네. 매형이랑 나랑 두 살 차이나면 나 1학년 때, 3학년이었던 거 아냐?’

‘응, 그렇지-’

‘난 미술부고 매형은 음악부였을테고. 그리고 조기 졸업했다며- 나랑 마주칠 일도 없었겠네, 뭐.’

‘하긴, 그렇겠다.’

드로잉 북을 탁 소리 나게 닫은 재환이 택운의 말을 끊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일어선 재환은 신혼집에 오래 뭉개고 있기 싫다며 엉덩이를 털었다. 돌아서는 재환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 택운도 몸을 일으켰다.

‘해도 따가운데 데려다주고 올게.’

‘어?’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택운에 놀라 반문하는 재희를 돌아볼 새도 없이 택운은 재환을 쫒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도 싫은지 층계로 내려가는 재환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모르는 척 해?’

조금은 서운했다. 그래도 제 연습실을 자주 찾았었는데. 알고지낸 시간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에 꽤 크게 자리했었는데. 그 시간을 부정하는 재환이 조금은 얄미웠다. 그러나 정작 재환은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다. 잡힌 손목을 아프지 않게 뿌리치며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멜 뿐이었다.

‘아는 척 할 거였으면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했었어야죠. 그때는 처음 만나는 사이인 양 해놓고 이제 와서 사실 아는 사이야-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저 가요. 들어가세요.’

재환이 돌아섰다. 살랑거리며 사라지는 재환의 머리칼만 눈으로 쫒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뿌리쳐진 손이 못내 아파와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재환은 변했다. 곱실거려 초코 머핀 같던 머리카락은 하얗게 탈색되어 하늘거렸고, 통통하던 뺨은 메말라 날카로운 턱을 그렸다. 내내 웃느라 휘어져있던 눈 역시 작은 웃음조차 그리지 않았다. 잊은 걸까. 그 6개월의 시간을, 재환은 잊어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나도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운아, 저녁 나가서 먹을까? 나 파스타 먹고 싶은데.’

‘그러자, 재환이도 부르고.’

‘재환이...?’

하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던 택운의 옆에 재희가 다가와 앉았다. 팔짱을 끼려는 팔을 슬쩍 피하며 오른손으로 멜로디만 연주하고 있자니 재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곧 재환의 이름 앞에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지만. 

‘운이 너 재환이 되게 챙기는 거 같아.’

‘그랬나?’

‘응, 매번 밥 먹을 때도 재환이 부르자 그러고, 연주회 보러갈 때도 재환이 데려가자 그러고.’

‘...네 동생이잖아. 내 처남.’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왜 자꾸 오른손만 연주해? 월광 소나타.’

그러게. 왜 멜로디만 연주하고 있지?


***


팸플릿을 손에 들고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회장엔 각종 유화들이 걸려있었다. 재환이 대학시절을 보냈을 파리의 전경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회장을 걸었다. 문득 걸음이 멈추었다. 어둠이 내린 작은 방. 세로로 긴 창문. 얇은 커튼. 택운이 고교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연습실이었다. 

“매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탈색을 거쳐 부슬거리던 머리카락을 진한 갈색으로 가라앉힌 재환이 서 있었다.

“아, 재환아.”

“어쩐 일이에요? 나 개인전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얼마 전에 연주회 왔다가 팸플릿을 봐서. 우연히.”

“...그렇구나... 그럼 보고가요. 난 잠깐 둘러보러 온 거라...”

“재환아.”

고개를 까닥인 재환이 등을 돌렸다. 기다란 봄 코트 아래 마른 발목을 보다 황급히 재환을 불렀다. 

“이 그림, 제목 말이야. 달의 눈물... 다시 만나면 알려준다고 했었는데, 왜 안 알려줬었어?”

“그랬던가요? 잊었나봐요. 죄송해요.”

재환이 다시 등을 돌렸다. 구두코는 습관적으로 신발코를 콩콩거리는 17살 재환의 운동화 코와는 달리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다.

“재환아.”

“...”

“연락하고 지내자. 이젠 우리 둘 뿐이잖아.”

살짝 돌려진 고개가 한번 까닥여졌다.


***


재희는 재환을 쫓는 택운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 시선이 재환이 다른 곳을 바라볼 때만 쫒는다는 것이 더욱. 택운은 매 식사 때마다 재환을 불렀다. 수저를 놀리는 손가락, 음식을 물고 오물거리는 입술. 재환의 모든 것에 택운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 때문에 재희는 한 술의 음식물로 삼킬 수 없었다.

‘가만 보면, 운이 너 나보다 재환이를 더 챙기는 거 같아.’

‘그래? 네 동생이잖아. 막 스무 살 되면서부터 파리에서 혼자 지냈다며. 그냥 안쓰러워서 그렇지. 말랐잖아.’

대수롭잖게 커피 잔을 입에 물며 답하는 택운에게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음료수 캔을 따려다 베이고 만 재환의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제 입에 문 택운을 바라보며 재희의 안색은 점차 창백해졌다. 


‘요즘 부쩍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택운을 따라 원식이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한국에서의 듀엣 연주회를 계획한 덕에 택운은 한창 바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재희의 취향에 맞춰 산 새하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풀던 택운의 옆으로 재희가 다가왔다. 조금씩 불러오는 배와 달리 메마른 몸과 창백한 안색에 택운을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어제 정기검진이라서 다녀왔잖아. 혈압 조금 높은 것 말고는 아무 이상 없다고 했었는데...’

‘통 식사를 못해서 그런가. 입덧이 심하거나 그러면 밥 못 먹는다던데. 넌 입덧도 안하지 않나?’

‘응...’

‘내일 그럼 너 좋아하는 파스타 먹자. 저녁 연습 뺄게.’

‘진짜?’

‘응. 재환이도 부르고.’

활짝 피어오르던 미소는 재환의 이름 앞에 사그라들었다. 응, 그래.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 재희는 아랫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오후 연습을 캔슬한 택운이 운전대를 잡았다. 재희가 미리 연락을 해두지 않은 탓에 택운은 재환의 임시 작업실을 향했다. 

‘미안. 요새 내가 깜빡깜빡해서...’

‘괜찮아. 그래도 레스토랑 예약한 시간은 맞출 수 있겠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건네며 재희는 차장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법 몸을 눌러오는 배에 넓은 뒷좌석에 앉아 좌석 너머 보는 택운은 핸들 위로 손가락을 까닥여 연주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익숙해 재희는 알 수 있었다. 택운이 무의식중에 연주하는 멜로디는 월광 소나타였다.


작업실 앞에 정차하고 있자니 곧 재환이 내려왔다. 뒷좌석에 타려다 재희를 발견하고 주춤한 재환은 어색하게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맸다.

‘머리카락 젖었네?’

‘아, 네. 유화 작업하고 있어서 냄새 날 것 같아서요.’

‘난 유화냄새 괜찮은데.’

‘아뇨, 아가한테 안 좋을까봐...’ 

‘머리 말리고 다녀. 봄이긴 해도 저녁에는 쌀쌀해.’

‘네, 매형’

머리카락을 만지는 택운의 손이 잠시 멈칫한 사이, 그 손을 피하며 재환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입술 끝을 늘여 미소 짓는 재희에게 마주 웃어주며 재환은 벨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재환아. 저녁먹자.”

대뜸 재환을 불러냈다. 당황한 듯 답 없는 휴대폰 너머 재환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 좋아하는 레스토랑 예약해둘게, 올 거지?”

‘....네, 매형. 갈게요.’

“그래, 이따 보자. 그리고 재환아,”

‘네.’

“....아니다. 이따 보자.”

그 매형소리 좀,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


재희의 몸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비쩍 마른 팔과 뺨. 퉁퉁 부어버린 다리. 재희는 잦은 두통에 시달렸다. 음식물을 조금만 먹어도 모두 게워버리기 일상이었다. 택운이 사다 준 야채 죽을 모두 게워내고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나온 재희가 걱정스러웠지만 다가오는 연주회 일정에 택운은 피아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병원이라도 가봐. 혼자 가기 불안하면 재환이 불러서 같이...’

‘재환이도 바빠. 맨날 택운이 너가 불러 대서 걔 작업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내가 어떻게 또 불러내.’

‘...그럼 가서 검사받고 나한테 연락해.  검사 끝날 쯤엔 연습 끝날 거야. 알았지?’

‘알았으니까 얼른 가봐. 원식이 기다리겠다.’

자꾸만 돌아보며 마지못해 현관문을 나서는 택운을 바라보며 재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럴 때 보면 날 사랑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자꾸만 아닌 것 같아.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눈앞이 흐려져 몇 번 눈을 부볐다. 몸의 이상증세는 이제 눈까지 좀 먹고 있는 듯 했다. 


***


“곧, 누나 기일이네요.”

느릿한 손으로 파스타를 비우던 재환의 입술이 움직여 목소리를 내었다. 일찍이 그릇을 비우고 와인을 굴리며 자리를 지키던 택운이 고개를 들었다. 흘깃 테이블 한 켠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니 어느새 6월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6월 30일. 재희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게. 벌써 그렇게 됐네. 시간 참 빠르다.”

“곧 3주년이에요. 이번 누나 기일 지나고 저 돌아가려구요. 파리로.”

“...파리에는 왜?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아는 사람 없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죠. 누나도 없는데.”

마지막 파스타면을 입에 몰아넣고 재환이 우물거렸다. 꿀꺽 삼키고 와인으로 입을 헹군 재환이 무릎 위에 펼쳐 두었던 냅킨은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잘 먹었어요, 매형.”

왜 아는 사람이 없어, 재환아. 내가 있는데. 삼켜지지 않는 와인이 입 안에 가득 차 있어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


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곧 도착한다는 기사님의 연락에 서둘러 아파트를 나서던 재희는 누군가 불을 꺼버린 듯 어두워진 눈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무거워진 몸은 멈추지 못해 계단 아래로 무너졌다.


연습하는 내내 휴대폰을 곁에 두고 있던 택운은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렸다. 응급실 한 켠에 누워 잠이 든 재희의 배는 처음부터 부른 적이 없었다는 듯 납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 유화로 엉망이 된 앞치마를 벗을 새도 없이 달려온 재환이 울음을 터뜨리지도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재환아...’

죽은 듯 누운 재희와 얼굴을 새하얗게 칠한 재환. 그 둘을 보고 처음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재희가 아닌 재환이었다. 택운을 보고나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재환을 품에 끌어안고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택운은 동시에 죄책감을 느꼈다.


임신중독증. 의사는 재희의 증상을 임신중독증으로 진단했다. 유일한 치료법은 출산인데 태아는 이미 유산되었으므로 아기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산모에게 신경을 써야한다, 의사는 택운에게 이리 일렀다. 

‘택운아. 나 집에서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약도 받아왔구. 정 힘들면 재환이 부를게.’

그러나 재희는 제 곁에 있으려는 택운을 집 밖으로 밀어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연주회에 집에 있으면서도 손가락을 까닥이는 택운을 재희는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연락해- 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연습실로 향할 택운을 알고 있었다.


***


작은 유리 상자에 앉은 재희의 사진은 택운의 피아노 위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택운과 함께 하던 미국의 작은 방,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재희의 사진. 그 앞에 재환이 놓고 갔을 백일홍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 보랏빛의 히아신스를 내려놓고 유리문을 닫았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재희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휘어진 눈꼬리와 크게 벌어진 입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익숙했던 미소는,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갔던 미소는 점차 재환의 것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왠지 올 것 같아서 와봤는데, 왔네요-”

뒤로 재환이 다가왔다. 조금은 시들해진 백일홍을 새 것으로 바꾸고는 택운의 곁에 섰다. 재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은 재환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30일에 안 오구...”

“...바빴어.”

“그렇구나...”

“재희 기일도 지났는데. 곧 갈거니?”

“네. 곧... 짐부터 천천히 보내고 있어요.”

“그래.”

그럼 인사 마저 하고 가요. 먼저 갈게요. 재환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느다란 목이 기울어지고 익숙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든 꽃을 끌어안고 단정한 걸음을 걸었다. 얇은 셔츠 너머로 도드라진 날개 뼈가 눈에 밟혀 눈을 감았다.


***


‘합병증 위험하다던데 병원에 있지...’

‘괜찮아. 나 그냥 집에 갈래. 너 연습하는 것도 구경하고 싶구.’

사라진 아기의 무게만큼 비어버린 마음으로 재희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에게로 향하는 택운이 눈이 동정 섞인 걱정으로 가득 차 있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눈이 사랑으로 가득 차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틈에 모두 사라졌을까. 눈물이 고일 것 같아 더욱 크게 입술을 끌어올리자 한숨과 함께 머리 위로 택운의 손이 내려앉았다.


택운이 원식과의 합주 연습을 위해 집을 비우면 재환이 재희의 곁을 지켰다. 샤워를 해도 몸에 베인 듯 미약한 유화 향을 풍기는 재환은 봄과 여름 사이의 차창을 바라보는 재희의 곁에 조용히 앉아 드로잉 북을 펼쳐들었다.

‘재환아.’

‘응.’

‘너 그 그림말이야. 상 받았던 그림. 달의 눈물이었나.’

‘응, 맞아.’

‘나 미국에서 택운이 처음 만났을 때, 택운이가 연주하는 월광 소나타 처음 들었을 때, 그 그림이 생각났어.’

하얀 종이 위에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택운의 옆모습을 그리던 손이 멈추었다. 혹여 재희가 볼까 빈 페이지로 넘기며 택운이 아닌 다른 것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문득 그림 속 장소가 택운의 연습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필을 떨구었다.

‘그 그림, 잃어버린 거 아니지?’


***


때 이른 장마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재희의 납골당에서 나와 갈 곳 없이 핸들만 돌리던 재환은 택운, 재희와 함께 종종 찾던 포차로 들어섰다. 매운걸 잘 먹지도 못하면서 택운이 매운 걸 좋아한다며 매운 낙지볶음이나 주문하던 재희 덕에 종종 찾았다 한들 먹어본 메뉴라곤 낙지볶음뿐이었다. 별 수 없이 낙지볶음과 소주를 주문했다. 오랜만이라며 요새는 도통 누나 부부도 찾지를 앉는다는 아주머니의 인사에 애매한 미소로 답을 하곤 맹물처럼 느껴지는 소주를 넘겼다.

‘그 그림, 잃어버린 거 아니지?’

재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굳어버린 재환을 돌아보는 재희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재환 대신 떨어진 연필을 주워 무릎 위 드로잉북 사이에 놓아주며 일어난 재희는 그림 속 검은 그랜드피아노를 잠시간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 뭐 먹고 싶은 거 있는데 사다줄래? 요 앞에 포차 있잖아. 거기 낙지볶음.’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가 이제 막 장사 준비를 하고 계시던 아주머니를 재촉해 낙지볶음을 포장해갔을 때, 재희는 상아빛 피아노 곁에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택운과 재환이 걱정하던 합병증이었다. 쓰러지며 피아노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뇌출혈이 발생했다고 재희의 퇴원을 말리던 의사가 말했었다.

“그때 쓰러진 누나 옆에 내 드로잉북 있었는데. 난 또 택운이형 연습실을 그려서 개인전에 전시까지 해버렸네.”

자책과 함께 술을 삼켰다. 아참, 택운이형 아니구 매형. 매형...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피아노 위에 엎드려 재희의 사진을 바라보다 잠이 든 듯 했다. 바라보다 잠이 든 건 재희인데, 짧은 꿈 너머에서 본 건 17살의 재환이었다. 하루종일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쏟아지네. 재희의 사진을 덮어두고 몸을 일으켰다. 더위를 식히는 장대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꿈 속 재환이 했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형은 빗방울 같아요.’

입 안이 썼다.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싶어 카디건을 걸치고 우산을 꺼내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빛 하나 없는 복도로 한 걸음 나서니 어둑한 조명이 켜졌다. 빛이 겨우 닿는 복도 끝,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재환이?”

연한색 청바지에 하얀 셔츠. 낮에 납골당에서 본 재환의 옷과 같았다. 그 앞에 몸을 숙여 앉으니 재환이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흠뻑 젖은 몸에 체온이 떨어진 듯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이러고 앉아있어. 비는 또 왜 다 맞구서는.”

“형. 택운이형.”

“술 마셨어?”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형은 빗방울 같다구, 내가 그랬었잖아요.”

“...”

“나요, 형으로 젖은 마음이, 단 하루도 마른 적 없어요. 그래서 비가 오면, 매번 맞았어요. 온 몸이 푸욱- 젖어버리면 안 들킬 것 같아서.”

기억나요? 묻는 재환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동안 잊고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기억났다고 답할 수 없었다. 젖은 어깨 위로 카디건만 벗어 덮어주니 새파란 입술이 뒤틀렸다.

“하긴. 기억할 리가 없지. 그림도 잊고 있었는데. 나랑 한 약속도 다 잊었는데.”

“재환아.”

“갈게요, 매형.”

차게 식은 몸이 휘청였다. 재환을 붙잡으려던 손은 힘없이 떨어지는 카디건만 붙잡았다. 엘리베이터의 철문이 재환의 몸을 삼키고 재환이 있던 자리엔 작은 물웅덩이와 재환의 가방에서 떨어진 듯 시든 백일홍 한 송이만 남았다. 잊어버린 약속.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에 피아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희가 가고 닫아버린 피아노 뚜껑은 벌써 3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집어져있는 재희의 사진을 다시 피아노 위에 세워두었다가 곧 쓰러뜨렸다. 천천히 피아노 뚜껑을 열고 깨끗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연주를 손에서 놓은 지 시간이 꽤 흐른 탓에 단번에 떠오르는 악보가 없었다. 무엇을 연주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오른손은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건반을 눌렀다. 월광 소나타.

‘또 월광 소나타야?’ 

재희가 타박하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른손을 따라 왼손도 천천히 건반을 두드렸다.

‘왜 매번 그 곡이야?’ 

연주가 뚝 멈추었다. 재환이 매번 조르던 곡. 

‘알려줄게.’

‘알려줄게. 가기 전까지, 나중에 돌아와서도. ’

아... 두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잊고 있었다. 재환이 건넸던 그림도, 재환에게 했던 약속도. 모두 잊고 있었다. 알려주기로 했는데. 연주하는 법.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세로로 긴 창. 봄과 여름 사이, 가느다란 비가 내리던 날 나누었던 첫 입맞춤도, 모두 잊고 있었다. 거칠게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커다란 소음이 거실을 울리고 반동을 이기지 못한 재희의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깨어져버린 사진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재환의 미소가 덧그려졌다. 


원식의 연락조차 받지 않고 집에 틀어 박혔다. 몇 년 간의 마른장마를 만회하려는 양 거세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아무 때나 재환의 얼굴이 떠오르면 두 손으로 단 한 곡을 연주했다. 거실에 드러누워 비가 그치고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배터리가 다 되었다는 경고음을 시끄럽게 삑삑거리는 휴대폰을 쥐었다. 원식으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 몇 건과 걱정, 분노, 체념이 담긴 메시지들을 감흥 없이 살폈다.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원식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나니 단 하나의 메시지만 남아 있었다.

‘오늘 5시 비행기에요. 잘 있어요.’

툭, 휴대폰을 쥔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휴대폰 역시 바닥을 굴렀다. 먹구름 대신 새하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재환과의 처음을 떠올렸다. 경쾌한 발걸음 소리, 콩콩- 신발코 두드리는 소리, 휘어지는 눈꼬리,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술. 기억 속 재환을 따라 미소를 짓고 있자니 그 미소는 점차 재희의 것이 되었다.

‘예뻐?’

‘예쁜 건 모르겠고, 닮았어.’

‘누구랑?’

‘...몰라.’

재희를 처음 만났을 때, 원식과 했던 짧은 대화가 스쳤다. 감았던 두 눈을 떠올렸다. 닮았어. 누구랑? 재환이랑. 상체를 일으켰다. 놓쳤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4시 15분. 힘없이 꺼져버린 휴대폰을 그대로 바닥에 두고 차키를 집어 들었다. 너에게 난 빗방울 같다고 그랬지? 나도 그래. 나에게도 넌 빗방울 같아. 젖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보면 흠뻑 젖어있게 만드는. 이제야 알았는데, 내 마음이 젖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는데. 황급히 공항으로 뛰어들었다. 파리로 향하는 게이트를 확인하며 정신없이 재환을 찾았다. 힘이 빠져 꺾일 것 같은 무릎을 억지로 지탱하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사람들의 바쁜 발소리, 늦은 승객을 찾는 방송소리가 순간 아득해졌다. 헐떡이는 숨소리만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게이트 앞에 앉아 비가 그친 활주로를 바라보는 재환이 보였다.

“재환아.”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고요를 방해하는 숨을 참으며 재환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커다랗게 뚫린 창 밖,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장마의 끝을 알리는 햇살이 부셔져 내렸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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